▲ 박건영 (논설실장)
'양(羊)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다'.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15~16세기 영국의 제1차 인클로저(enclosure)운동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인클로저란 '토지에 울타리를 쳐서 막는다'는 뜻이지만, 여기선 양모 생산을 위해 다투어 농경지를 목장으로 전환하던 현상을 일컬은 말이다.

14세기 이후 신항로 개척 등에 따른 모직물 수요 증가는 농업 보다는 목양업의 장래를 밝게 해준다. 이에 영국 지주들 입장에선 토지에서 지대를 받는 것 보다 대규모 목장을 만들고 양을 기르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그래서 너도 나도 흩어진 토지를 한데 모아 대규모 목장을 만들고, 거기에 울타리를 쳐나갔다. 농민들은 거의가 농토에서 쫓겨나 도시의 싸구려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야말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 영국에 위기가 닥쳤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와 전쟁이 터지자, 그때까지 프랑스에서 수입해 오던 곡물 공급이 끊긴 것이다. 급박해진 영국은 어쩔 수 없이 대규모 목장들을 헐어버리고, 토지의 대농장화로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제2차 인클로저 운동이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 국민의 80% 정도가 농민이었다. 그러나 경제개발에 따른 산업화 도시화는 농민들을 대거 도시로 몰아가 임금 노동자로 만든다. 농경지 또한 격감됐다. 마치 제1차 인클로저를 연상케 해준다. 공업부문의 급속한 비중 증대와 대외지향적 성장전략의 결과다.

지금 우리의 농민은 5천만 가까운 인구 중 기껏해야 300여만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60대 이상 노년층이 대다수다. 농경지 역시 180여만㏊ 밖에 안남았지만, 갈수록 휴경지가 늘고있다. 자연히 농업 생산력이 크게 저하되고 곡물 자급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현재 곡물 자급률은 겨우 27%다. 그것도 쌀을 제외하면 달랑 5%다. 밀 0.2% 옥수수 0.8% 콩 11.3% 식이다. 마침내 세계 3위의 곡물 수입국이 돼버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근들어 국제 곡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인구대국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 및 바이오 연료용 곡물소비 급증 등으로 수요는 대폭 느는 반면, 곡물 수출국의 기상이변과 재배면적 감소, 일부 수출국들의 식량 무기화에 따른 공급량 격감 등이 원인이다.

과거 곡물가 파동은 주로 흉작과 같은 일시적 현상이라 비교적 단기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계적 이상기후와 온난화 등으로 생산증대를 장담 못하는데다 바이오연료붐 등 꾸준한 수요증대로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게다가 주요 곡물 수출국들이 잇따라 수출 규제에 나서고 있다. 세계 제2의 쌀 수출국 베트남이 신규 수출을 중단했고, 3위 인도도 쌀과 밀의 수출을 금지했다. 러시아 아르헨티나 중국 등도 주요 곡물에 수출관세를 신설하거나 관세율을 높여 수출을 억제하고 있다. 식량 무기화에 본격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식량 수입국들은 어쩔수 없이 곡물 사재기에 내몰릴 판이다.

주요 곡물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로선 결코 강건너 불이 아니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곡물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언제 밀어닥칠지 모른다. 식량안보 대책이 시급한 이유다. 급한대로 유휴농지 활용부터 서둘러야 한다. 매년 4만㏊ 가량의 농지가 도시 및 산업 서비스용으로 사라지는 것도 급히 통제할 필요가 있다. 연간 10조원어치씩이나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 역시 크게 줄여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 해외농지 매입을 비롯, 곡물 수입처와 수입 방법의 다양화 등이 적극 모색돼야 할 것이다. 각계에서 나온 주요 대책들을 추려 보았다. 충분히 타당성 있고 또 절실한 대책들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다. 정부는 지난 인수위 시절 가뜩이나 얼마 안남은 농지의 규제완화를 발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 상황과는 거꾸로 가는 것만 같은데, 아직도 그 방침엔 변함이 없는지 진정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