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차별이 교육현장에서 버젓이 통행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일부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동급생 수학여행 행선지를 그룹별로 국내·외 6곳으로 나눠 다녀 온 것이다. 다양한 경험을 서로 나누는 교육프로그램의 하나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차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개중에는 위화감에서 오는 자녀의 무력감을 걱정해 무리하는 부모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가정형편에 따라 그룹이 결정지어진다. 학생들이 지불하는 여행비용이 최대 9배나 차이난다고 하니, '부모를 걱정해서 알아서' 결정하는 철든 학생도 있겠지만 '부모의 능력을', '학교의 비교육적인 행태를' 못마땅히 여기는 학생도 적지 않다고 본다.
학생들의 반응을 보자. 외국을 선택해 다녀 온 부류는 국제감각을 익히는 등 글로벌시대에 적절한 조치였다고 강변한다. 국내 여행을 한 그룹은 외국여행을 하고 온 친구들이 부럽기만 하다. 상당수 학생들이 가고 싶었던 곳과는 상관없이 각자의 경제력에 따라 코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외국에서도 지갑의 두께로 기가 죽기도 한다. 무리한 가정의 학생 씀씀이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며, 이 것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린시절을 겪은 어른들이라면 다 알 터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교육자인 해당 학교측 관계자다. 글로벌시대에 해외로 나가 견문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학생들 만족도가 매우 높아 비용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국내에 갈 수 있는 곳이라야 에버랜드나 서울랜드 등이 전부로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이들에게는 반대 급부의 학생은 없는 듯하다. 또한 해외견문은 필요하고 국내 곳곳에 널려 있는, 알아야 하고 보전해야 할 우리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자국의 역사는 몰라도 해외 견문만 넓히면 글로벌시대 자랑스런 한국인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더욱이 여행의 궁극의 목표는 어울리고 이해하고 단합하며 추억을 쌓는, 교정에서 찾지 못하는 교육적 가치가 있다. 급우간 빈부의 차를 확인하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수학여행은 아니었는지 교육자적 양심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학교도 사회와 같이 공동체로 개인 차가 뚜렷하게 존재한다. 대학진학 등 기회도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리 주어진다. 하지만 이것이 차별을 용인하는 근거가 돼서는 안된다. 다변화 세태에서 학생들을 흠결없이 키운다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를 조장해서는 안된다. 최선을 다해 능력에 맞게 방향을 잡아 주고 각자의 길을 가도록 도와 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며 학교에 주워진 의무라 하겠다. 좋은 추억도 곁들여서 말이다.
철학자들은 "장님으로 태어난 것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시력은 있으되 꿈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가장 좋은 교육은 아이들에게 웃음을 가르치는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고 했다. 교정에서 꿈을 키우고 웃음이 넘쳐 나면 희망이 있다.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간의 만남은 가슴과 가슴, 영혼과 영혼,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어야 하며 그래야 교육도 학생도 제대로 설 수 있다. 교정에 차별과 경쟁만이 가득하면 내일의 세상에는 무엇이 남을 지 상상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