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살이 박힌 왼손 중지는 휘어보였다. 그 손으로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49)은 또 가방을 싸야한다. 기타는 동반 목록 1호.

   5월 일본 클럽 투어와 '규슈 블루스 페스티벌'에 다녀온지 20일 만인 5일 그는 노르웨이로 간다. 6일 노르웨이 한 클럽에서 공연하고 7일 인근 섬에서 '브라그도야 블루스 페스티벌'에 두번째 참가한다.

   그는 척박한 국내 블루스 시장에서 한 길을 고집하고 있다. 의도해서 독불장군이 된 것은 아니다. 일본만 해도 블루스의 저변이 두텁지만 국내에서 블루스는 미디어가 외면하자 설 자리를 잃었다.

   그래도 김목경은 최근 6번째 음반을 발표했다. 신곡 6곡과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아침에 깨어보니' 등 자신의 옛곡을 다시 담았다.

   재킷에는 '나는 참 웃긴다. CD 시장이 없어진다는데, 또 음반 한 장을 낸다.~ 어떤 사람은 이런 환경 속에서 블루스하는 사람이 음반을 내는 건 거의 기적이란다'는 글을 남겼다. 홈페이지에 '음반 10장, 20장 구매자들의 이름을 재킷에 적어주겠다'는 공지를 냈고 약속을 지켰다.

   "다음에는 100장 이상 구매자에겐 사진도 찍어주려고요. 하하."

   1일 그의 단골집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 5시간에 걸쳐 긴 대화를 나눴다.

   ◇"마음 편히 진짜 블루스 하고 싶다"
음반의 첫곡 '여우비'는 '어~ 이건 오히려 포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멜로디도 무척 대중적이다. 그는 블루스 뮤지션으로서의 원초적인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번 음반의 '목스 블루스(Mok's blues)' 같은 진짜 블루스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만들어봐야 방송국에서 걸어주지도 않고, 사려는 사람도 없죠. '이게 무슨 블루스야'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돈을 내라.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만들어줄게'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자비로 음반을 만드는 그는 '어떻게 하면 블루스의 맛이 담긴 대중가요를 잘 빚을까'를 매번 고민한다.

   그래서 일본 투어를 할 때면 늘 부럽다.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아도, CD를 팔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열도 전역에 500개의 클럽이 있어 일본 블루스 뮤지션의 1년 투어 스케줄은 빡빡하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수많은 블루스 뮤지션이 있고 실력도 대단해 놀랐어요. 눈을 감으면 완전 흑인의 연주였죠. 아마추어에게도 설 무대가 많은 건 뮤지션의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일본의 한 감독은 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이번 투어에 함께 다녔습니다."

   신촌블루스 이정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그는 뒤를 이을 후배가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아무리 기타 속주에 능해도 비비 킹(BB king)이 한 음을 지그시 누를 때의 진한 감동에 비할 수 없죠. 블루스는 보컬보다 기타로 말하는 음악이어서 연주자의 혼을 잘 전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서양의 음악을 해도 한국인만의 정서를 녹여낼 수 있죠. 요즘 친구들 R&B, 힙합 등 흑인음악 한다고 하잖아요. 블루스는 흑인음악의 기본이에요. 해외 시장에서 자기 음악을 팔려면 블루스를 모르면 불가능합니다."

   ◇"영국 클럽 시절이 내 음악 토대다"
김목경은 음악적 토대를 마련하고 사회화가 된 시점으로 영국 유학 시절을 꼽았다. 1984년 군 제대후 계명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3학년으로 중퇴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에릭 클랩튼의 고향인데다 '백판(복사 LP판)'과 AFKN(주한미군방송)으로 접하던 뮤지션의 라이브를 들어보리라는 순수한 생각에서였다.

   3개월의 랭귀지 스쿨이 계획이었지만 이후 6년간 단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지 않았다. 첫날부터 문화 소식지 '타임 아웃(Time Out)'을 뒤져 공연장을 쫓아다녔다. 접시닦이, 페인트칠, 한국 관광객 픽업 아르바이트를 했다. 2년제 아트 칼리지를 다녔고 밤에는 오전 2시까지 클럽에서 기타 연주를 했다.

   "그때 제 별명이 '스리 어 클록 맨(three o' clock man)'이었어요. 오전 3시께 술에 취해 기타를 계단 벽에 이리저리 쿵쿵 부딪히며 귀가했기 때문이죠."

   1988년 영국 클럽의 한 블루스 밴드에 들어가 1년 넘게 투어를 다녔다. 영국 생활을 하며 쓴 곡을 밴드 마스터에게 부탁해 녹음했다. 1990년 6월 귀국해 이 음반을 서라벌레코드에서 LP로 냈다.

   "홈스테이 때 주인집에서 페인트 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솜씨가 좋다고 입소문이 났어요. 일이 계속 들어왔고 2년 만에 4층짜리 집을 사서 7개 방의 임대업을 했죠. 그때 번 돈이 첫 음반 제작의 종자돈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장남인 저만 두고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간 거 있죠. 하하."

   국내 시장에서 자갈밭만 갈던 그는 본격적으로 기름진 해외 시장에 씨를 뿌릴 계획이다. 미국, 유럽 시장에서 음반 발매 제의가 있고 일본의 블루스 전문 레이블 피-바인(P-Vine) 레코드와는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 영어로 쓴 자작곡은 이미 완성해둔 상태다.

   7월11~12일 서울 대학로 라이브극장에서 공연도 한다.

   "10여년 전 충돌 소극장에서 공연하는데 관객이 세 사람이었어요. 공연을 접고 관객과 무대 뒤에서 소주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팬이 얼마 전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는데 감개무량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