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배 (인하대 법대 학장·객원논설위원)
로버트 러플린 총장. 국내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출신 외국인 대학 총장이었다. 그는 카이스트를 초일류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연임에 실패했다. 한국의 대학과 과학계 히딩크로 기대를 받았던 그가 낙마한 이유가 리더십 부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의 대학문화 탓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노벨상을 수상했을 만큼 자기분야에서는 세계적 전문가였지만 한국의 대학총장이라는 낯선 영역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이명박 대통령. 적어도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건설 분야에서 세계적 전문가였다. 현대건설의 신화와 청계천 복원의 성과가 그 예다. 그런데도 그가 대표적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대운하 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대다수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한때 우리사회를 대표하던 존경과 능력의 상징이 CEO형 리더였다. 구질구질해 보이고 말썽 많아 보이는 조직을 세련되게 슬림화시키고, 이익 또한 극대화시키는 마술의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조직의 슬림화나 구조조정이란 CEO의 희생이 아니라 결국 해고를 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장과 조직에서 대상자를 골라 무능과 부패 그리고 제거되어야 할 해악의 대명사로 낙인찍어 하루아침에 퇴출시켰다. 기삿거리가 된다고 본 언론들은 앞 다투어 그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해악의 근원을 도려낸 결단과 용기를 찬양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분노로 들끓고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허술한 사회에서 해고는 단순히 직장을 잃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익창출의 극대화라는 CEO의 구호 속에는 실업의 공포와 가족붕괴의 어두운 그림자가 넘실대고 있다. 퇴출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번듯한 직장이 아니라 망연자실한 가족들이다. 투기자본의 이익송금은 보장되면서도 길거리로 내쫓기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세계화 정책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향해 '그가 국가를 회사로 보고, 국민을 회사원으로 보고 있다'는 비판에는 그로 대변되는 CEO형 리더들에 대한 불신이 그대로 담겨 있다. 사람과 가족을 책임지는 공존형 사회가 아니라 실적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선택형 사회의 상징으로 그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멀쩡한 사람들이 구조조정의 이름으로 거리에 내몰린다. 삶의 기본인 먹거리나 직업 하나 신경 써 주지 못하는 정부가 사람 자르고, 또 자기사람 채우기에 바쁘다. 대운하사업이나 공기업의 민영화도 결국 수완 좋은 CEO의 실적을 채워줄 수단으로 국민들이 보는 논거다. 공익과 사익을 구별하지 않는 정부의 행태에 불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들이 절규한다. 비록 수익률이 떨어지고, 생산성이 좀 낮으면 어떠한가. 직장이 있어야 먹고 살고, 가족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왜 대통령이 존재하는지. 과연 국민을 위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국정운영의 철학은 있는지. 근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다. 개혁으로 포장된 정치적 구호에 국민들은 이제 넌덜머리가 났다. 국민들은 포용력과 동반을 통한 공존을 기대하지만 리더들은 강자만을 우선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사표와 퇴출의 대상이 아니다. 당당하게 일하고, 그 몫을 받아야 할 국민의 자격을 갖고 있다. 격렬한 촛불 시위 앞에 마땅한 수습책이 없어 보이는 지금. 현재가 불만스럽고, 미래가 불안한 국민들이 왜 자기희생과 포용력이 넘치는 새로운 리더를 갈망하는지. 지친 속내를 읽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과 CEO형 리더들에게 러플린 총장이 한국을 떠나며 남겼다는 말을 되새겨 보기를 권한다. '한국은 개혁보다 평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실망했다는 국민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다음 지도자를 찾아라'. 그것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