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영 (논설실장)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한때 TV전파를 타고 안방에 울려퍼졌던 어느 가구회사의 광고 카피다. 자신들이 만든 침대가 과학적 연구성과를 많이 담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멋모르는 사람들에겐 엉뚱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던 내용이다. 오죽하면 한 초등학교 시험에서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침대'라고 답한 학생이 속출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인들이 미 쇠고기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더 배우기 바란다"고 했다. "뭣 좀 알고 쇠고기 이야기를 하라"는 식으로 들렸다. 혹 '침대' 답변을 했다는 초등학생들을 떠올린 게 아닌지 모르겠다.

문득 19세기 초 한 서양인이 그렸다는 '한국인 상상도'가 생각난다.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에서 옮겨 실었다는 어느 책에서 본 그림이다. 한쌍의 남녀 그림인데 남녀 모두 옷 대신 굵은 줄무늬천으로 몸을 둘둘 말았다. 머리엔 삼지창처럼 삐죽 삐죽한 게 장식으로 얹혀있다. 게다가 여자는 가슴을 모두 드러낸 반라의 모습이다.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기야 그 시절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그들이 멸시하던 인디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쇄국 탓에 당시 서구인들이 으스대며 자랑하던, 소위 근대화에 서툰 한국인들의 모습이 꼭 미개인들처럼 보였음직도 하다.

그같은 이미지가 여지껏 씻겨지지 않아, 버시바우도 그런 발언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정녕 그렇다면 우리의 외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 버시바우라면 세계 최강국의 외교관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우리와 어울려 산 세월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직업 외교관인데, 설마 한국을 그토록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우리 국민에게 일부러 어깃장을 놓은 것일까, 아니면 우리를 너무 쉬운 상대로 여긴 것일까.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당연한 반응이지만, 그의 발언에 대한 성토와 항의가 연일 이어졌다. 시민들 분노는 물론, 여야 정당들도 한 목소리로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한국민 전체에 대한 모독'이라며, 심지어 버시바우 추방 서명운동까지 벌였다. 항의 서한을 보낸 정당도 있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버시바우를 만나 점잖게 충고도 했다. "한국은 농경국가이기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정서가 쇠고기에 스며 있다. 미국 정부와 미국인, 대사는 이런 독특한 문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충고는 좋았는데 뭔가 2%쯤 찜찜하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정서'란 말이, 자칫 과학을 모른다는 버시바우의 말을 시인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또한 쇠고기 문제의 본질이 국민건강권 및 검역주권이 아닌, 한국의 정서적 특징 때문이란 오해를 살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에 앞서 버시바우를 만났다는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 역시 "문화적 차이가 있으니 오해받지 않도록 단어 선택을 잘 해야 한다"고 조언하는데 그쳤다고 한다. 아마도 두분 모두 외교적 결례를 범할까봐 한껏 점잖은 말씀들만 골라서 한 것 같다.

버시바우와 공개토론 제안을 검토한다는 서울대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교수들의 결정이 그래서 더 기다려진다. 그들의 토론 제안서엔 "버시바우가 과학을 이야기했으니, 정말 한국인의 우려가 비과학적인지 논리와 데이터로 토론해보자"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진정한 우리 국민의 정서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모쪼록 토론이 이뤄진다면 좋겠다. 그래야 누가 옳고 그른지 좀더 명확해짐으로써 쇠고기 문제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어쩌면 '한국인 정서 십분 이해' '일부 한국인에 불쾌감 준 것으로 해석돼 유감' 식으로 넘어간 버시바우의 보다 진솔한 사과를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