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사카 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한복판에 한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장마 비가 사정없이 내리던 날. 미술관에서 꼼꼼한 안내를 받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과연 내가 이 미술관에서 받은 충격은 무엇일까.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내내 고민에 빠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적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느낀 감정과 달리 왜 답답함과 뭉클함이 가시지 않는 것일까.
우선 미술관의 탄생부터가 배울만하다고 생각했다. 미술관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아타카에이치(安宅英一)와 이병창 박사이기 때문이다.
아타카 Collection은 주로 상감청자와 조선백자로 대표되는 1천여점의 도자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회사가 도산하자 작품의 분산과 해외 유출 문제가 일본 문화청과 국회에서까지 문제되었다. 결국 작품들은 스미토모(住友)그룹이 오사카 시립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일단락되었고, 이를 위해 오사카시가 동양도자기미술관을 설립한 것이다.
그런데 초대 오사카 외교관이었던 이병창 박사가 평생 수집한 한국 도자기 301점과 살던 집 등을 같은 미술관에 모두 기증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이병창 Collection Gallery와 도자기 연구실을 1999년에 증축하여 개관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도자기 전문 미술관으로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는 정평을 얻게 된다.
나는 일본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어떤 이유로 크고작은 문화 공간들이 많이 설립되고 운영되는가. 문화재 보호에 대한 특별한 의식 때문인가 아니면 정책의 결과인가. 그 시작은 역사적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패전 후 이른바 명문가와 부호들이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고 한다. 연합국사령관 자문단이 일본의 세제 개혁을 권고했고, 이를 받아들여 부유세를 신설하였다. 그런데 세금 회피와 현금의 필요성 때문에 집안 장롱 깊숙이 감춰져 있던 고미술품들이 문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적인 미술품들은 돈만으로는 가질 수 없다. 명품을 갖기 위해서는 시운·혜안·자금·배짱이 있어야 한다.
특히 천재일우의 시운 덕분에 명품을 거머쥔 일부 기업의 경영자들이 미술품을 사들여 사립미술관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 콜렉터이었던 이병창 박사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을 왜 일본 오사카에 기증을 한 것일까. 이토(伊藤郁太郞)관장은 재일 2, 3세 교포들에게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자랑스러움, 긍지와 자부심을 전하고, 그들을 고무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증의 장소로 '문화유산을 가장 적절하게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시설로 당관을 선택했다'는 표현은 부끄럽고,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 박사의 선택대로 한국에서는 유교 혹은 봉건의 잔재로서 그리고 종교적 이유로 배척되고, 버림받았던 제기(祭器)가 세계적 차원의 문화재로 승화되고 있었다. 분청자기의 세계적 대명사이자 전시회 포스터의 얼굴이 된 '분청백지상감 조선문 제기'를 마주하면서 묻고, 또 물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문화인을 갈아치우고, 그것도 모자라 민영화의 이름으로 문화시설에 대한 위탁이 거론되는 지금. 과연 이 박사가 오사카에 문화유산을 기증하던 그때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도 아트센터를 앞세운 개발과 문화공간의 위탁경영 문제로 시민사회가 부글거리고 있다. 우리들은 언제가 돼서야 제2의 이병창 박사와 오사카시를 만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