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블랙박스'가 택시에도 장착돼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비행기 운항기록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진짜 블랙박스(black box)보다는 기능면에선 조금 뒤떨어지지만, 이를 장착한 차량이 사고가 날 경우 사고 전후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은 획기적이란 평가다. 운행 중인 차량 앞 상황을 영상으로 담고, 차량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도 빠짐없이 녹음된다.

인천에서 운행 중인 법인택시 5천385대가 모두 전국 최초로 영상저장장치, 일명 '블랙박스'를 장착했다. 영업용 택시 전량이 올해 5월까지 부착을 완료한 것이다. 차량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가 잘못했는지를 그대로 나타내 '제3의 두뇌'라고도 불린다. 이 블랙박스 앞에선 사고와 관련한 운전자끼리의 다툼도 필요없고, 목격자를 찾느라 애를 쓸 이유도 없다.

그러나 차량 안에서 나누는 사적인 얘기까지 가감 없이 기록되는 특성으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운전자들도 적지 않다. 물론 손님들도 자신들이 하는 말이 녹음된다는 사실을 알면 왠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택시 블랙박스가 실제 어떤 역할을 했고, 또한 개선점은 없는지 살펴 본다.

 
 
# 도입 배경


전국 택시 사고율 통계를 보면 인천은 2003년 이후 4년째 줄곧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다. 인천 택시들은 2005년 무려 63.2%의 사고율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16개 시·도 평균치보다 20%P 이상 높았다. 시민들은 지역 택시업계를 향해 '사고 천국'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런 불신은 2006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인명 피해와 처리 비용은 늘 수밖에 없었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할 땐 법적 소송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도 막대한 경비가 들었다.

5천여대의 법인 택시를 회원으로 둔 인천택시공제조합(이하 공제조합)은 이 문제를 찾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세계 제일의 서비스 기업으로 불리던 일본 MK택시의 영상저장장치 '블랙박스'가 바로 그 열쇠였다.

지난해 4월, 5개 업체 280여대에 시범 설치했다. 당시 1대에 38만원짜리 일본 H사의 제품을 들여왔다. 1억원이 넘게 들었다. 차량 충돌이 발생했을 때에만 감지·녹화된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런 문제로 업계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공제조합은 영진기업 등 5개사로 블랙박스 선정위원회를 구성했다. 6개월간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작동 오류를 개선하고, 관리 및 교육 방안을 모색하는 등 '한국형 블랙박스' 찾기에 열을 올렸다.

현재 블랙박스는 국내 토종기업이 만든다. 상시녹화를 비롯해 녹음, GPS(위성 위치 확인장치) 등의 성능을 갖췄다. 비행기 블랙박스에 가까워진 것이다. 가격은 일본 것의 3분의 1 수준이다. 카메라에 달린 센서는 평소 운전자 시선으로 전방의 도로 상황을 감지하다가 충돌, 급브레이크, 급격한 핸들 조작 등 충격이 가해지면 즉각 반응한다. 사고가 발생했을 땐 영상이 20초 동안 기록되고 전후로 10초씩의 상황을 메모리카드에 자동적으로 보존하게 된다.

# 타 지역으로 확대

택시 사고율은 블랙박스를 장착하고 나서 확연히 감소했다. 블랙박스는 택시 운전자들에게 준법 운전 의식을 심어주는 '감시자'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인천은 2008년 5월, 교통사고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3% 줄어들었다고 한다. GPS는 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줬고 과속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온 셈이다. 이런 장점은 경기도 택시공제조합이 국고 지원을 받아 블랙박스 장착을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 6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이 사업과 관련, 도와 시·군이 각각 50%씩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택시 블랙박스는 앞으로 전국으로 확대될 것으로 택시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 사생활 침해 논란

택시 블랙박스 설치에 따른 사생활 침해 소지도 풀어야 할 숙제다. 택시에 타고 있는 운전자와 승객 모두가 비밀스런 말이나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블랙박스가 차량 내부에서 오가는 대화를 저장하므로 한 마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또한 운전기사의 경우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정지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회사 관리자가 감시할 수 있다. 실제로 도입 초기, 노조는 '블랙박스=통제 수단'으로 공식화하며 사 측에 강력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반발 움직임은 사그러들었으나 완전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과 같은 존재다.

노종철 인천공제조합 관리차장은 "운전 종사자들에게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활용 방안을 꾸준하게 알리고 있다"며 "영상저장장치는 사고, 요금 등의 시비에서 운전자를 대변해 정확한 경위를 설명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 현장에서의 쓰임 사례

▲ 신호를 어긴 버스와 부딪혀 운전자등 2명이 숨진 택시의 외형.
▲ 장면 1=지난 5월 25일 새벽 1시17분께 인천시 연수구 동춘동 대형 할인마트 앞 사거리에서 택시와 광역버스의 충돌 사고가 났다. 신호가 있는 교차로에서 직진하던 버스와 좌회전하던 택시가 사고를 낸 것이다. 택시에 타고 있던 승객과 운전자 모두 숨졌다. 차량이나 보행자가 없던 터였다. 목격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버스 기사의 진술에 따라 사고경위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기사는 '영업용 택시의 신호 위반'이라며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택시 운전자가 가해자가 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택시엔 블랙박스가 있었다. 택시는 좌회전 신호를 따라 운행했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다. 이 블랙박스 기록 앞에서 버스 기사는 할 말이 없었다.

▲ 차량과 오토바이가 충돌하기 직전 블랙박스는 전방에 초록신호를 나타내고 있다.

▲장면 2=올 3월 28일 새벽 3시28분께 서구 석남동 기아사거리. 택시가 오토바이를 치었다.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1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2명은 중태에 빠졌다. 오토바이와 택시의 사고가 나면 보통 차량의 과실이 많게 마련이다. 그러나 경찰은 블랙박스를 확인하고 택시 운전자의 잘못이 없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차량은 정상 신호에 이동했으며 오토바이를 몰던 3명의 고교생이 헬멧도 쓰지 않은 채 신호까지 어겼던 것이다.


▲ 술에 취한 승객(왼쪽)이 택시 기사를 강제로 잡아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장면 3=낮 시간에 한 시민이 택시를 탔다. 승객은 이미 얼큰하게 술이 취했고 차에 오르자마자 불쾌한 언행을 일삼았다. 잠시 후 만취자가 기사의 안면 부위를 주먹으로 때리는 등 폭행까지도 서슴지 않자 기사는 즉각 차를 세우고 카메라의 렌즈가 고정된 차량 정면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그러자 잔뜩 취한 승객은 쫓아나와서 어김없이 화풀이를 해댔다. 주변을 주행 중이던 동료 기사가 이를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경찰관까지 출동했다. 녹화된 동영상을 확인한 승객은 고개를 떨궈야 했다.

인터뷰 / 한도섭 전국택시공제조합 인천지부장 "운전습관 개선… 사고 감소효과"

"매일 일어나는 수십건 교통사고 중 1건을 처리하는 데 보상, 소송 등으로 많게는 수십억원까지 들어갑니다. 블랙박스는 일부 설치 비용만 부담하면 장기적으로 사고율 감소 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됩니다."
영업용 택시에 차량 영상저장장치 도입을 첫 시도, 본격화한 한도섭 전국택시공제조합 인천지부장. 지역 내 전 차량으로 확대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해외 사례를 경험하기 위해 2006년 일본을 4~5차례 방문했고 현지 생산업체의 도움을 얻기 위해 발품까지 팔았다.
유럽의 경우 2010년부터 출고되는 택시에 필수적으로 블랙박스를 장착하도록 할 것이란 점도 확인했다.
그는 "(블랙박스를 단 뒤)갈수록 대형 사고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어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공제금 지출 감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며 "기본적으로 운전 습관이 개선됐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지부장은 지난해 초 시범적으로 도입할 당시 '인권 침해'라고 주장하는 일부 노조의 반발에도 직접 중재에 나섰고 전면에서 대화로 그들을 설득했다.
이달 중순 열리는 전국공제조합 운영위원회에서는 이 블랙박스 장착 의무화가 안건으로 채택됐단다.
그는 "아직은 정착 단계이므로 결실을 보기에는 시일이 더 걸릴 것 같다"며 "블랙박스 도입 1년이 지난 후 현재 사고율 60% 수준에서 10% 이상 더 줄이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