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 (수원대 경상대학장·객원논설위원)
지금부터 꼭 100년 전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이 개시될 무렵의 일이다.

전국적으로 부동산 투기바람이 불자 이참에 땅을 매각하려는 지주들이 많이 생겨났다. 당시에는 일본 화폐의 국내 통용도 점차 늘어갔는데 엔화는 화폐가치가 안정되어 상거래수단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도시에 국한된 것일 뿐 시골 오지에서는 엔화를 처음 구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서 어이없는 일도 발생했다. 일부 악질적인 일본인들은 어리숙한 시골 지주들에게 접근, 땅값을 후하게 쳐준다고 유혹한 뒤 10엔짜리 지폐를 물에 불려 앞면과 뒷면을 분리해 20엔으로 계산하거나 혹은 위조화폐를 건넨 다음 제3자에 되팔아버리고 도주하는 일이 빈발했던 것이다. 대박을 좇아 시류에 편승했던 상당수의 시골 촌로들만 낭패를 당했다.

원-달러 환율이 900원대에 머물던 작년에는 키코(KIKO·Knock-in, Knock-out)라는 신종 파생금융상품이 한창 유행이었다. 대기업처럼 환헤지 전담팀을 갖추지 못한 수출중소기업엔 안성맞춤이었다. 이 상품에 가입하지 않는 중소기업 사장들은 원시인(?)쯤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 은행원들은 대출 시 '꺾기' 방식으로 키코 가입을 권유하거나 신용등급을 실제보다 높여 약정액을 끌어올리는 등의 선심을 베풀기도 했다. 수출액을 훨씬 능가하는 오버헤징도 비일비재했다.

키코는 환율이 약정한 범위 안에 머무를 경우 시장가보다 높은 지정환율(행사가)로 외화를 매각할 수 있어 환차익은 물론 지정한 하한선 아래로 떨어지면 계약무효(녹아웃)가 되어 기업은 손실을 입지 않는다. 짭짤한 환차익을 누리는 기업들도 다수 생겨났다. 국제경쟁이 나날이 치열해지면서 수출경쟁력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터에 웬 떡(?)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횡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연초에 들어서면서 환율이 점차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상승 속도가 더욱 빨라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수출을 촉진한다며 환율상승을 부채질했다. 키코에 가입한 기업들의 환차손액이 총 1조4천781억원에 달했는데 이 중 중소기업이 본 피해액만 1조1천387억원으로 전체 손실의 77%다. 환율이 당초 약정한 상한선을 넘어서면서(녹인) 키코계약 기업들은 약정액의 2~4배에 해당하는 달러를 시가에 매입, 이보다 훨씬 낮은 지정환율로 은행에 되팔았기 때문이다. 계약을 청산하려 해도 현재의 환율하에서는 엄청난 금액을 일시에 지불해야 하는 탓에 언감생심이었다. 중소기업들이 도산위기에 직면하는 등 '키코 쇼크'로 불릴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코너에 몰린 기업들이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불량상품을 팔았다고 은행에 항의했으나 "제 발로 찾아와 가입해 놓고 이제 와서 생떼를 쓰냐"며 면박만 당했다. 다급해진 기업들은 지난 6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호소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소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중소기업중앙회와 무역협회는 정보의 비대칭성, 상품설계의 불공정성, 계약평등 위배, 국민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들어 계약무효를 주장하는 등 정부가 사태를 수습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극소수 오버헤징한 기업들만 문제가 될 뿐 환율급등에 따른 환차익도 커 거시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한 술 더 떴다. 즉, 키코의 약관에서 불공정거래 혐의를 확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은행들이 키코를 팔 때 소비자들에게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했는지에 대해서는 소송을 통해 확인해 보라며 공을 법원으로 넘긴 것이다. 환율 불안시대를 맞아 발빠르게 대응했던 수많은 수출중소기업은 분통이 터진다. 고질적인 뒷북행정도 문제려니와 환헤지를 적극 권고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니 말이다.

환율 불안시대를 맞아 환헤지 상품이 대량으로 쏟아지면서 기업은 물론 이 상품에 대한 가계의 수요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상품 설계구조가 워낙 복잡하고 내용도 생경해 소비자 입장에선 득실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융당국의 보다 철저한 지도와 감독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