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 화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최근 드라마로 부각된 '이산 정조'와 '개혁정치의 근거지' '효의 도시' 같은 수사였다. 이러한 분석들은 일면 타당한 측면들을 갖고는 있지만 지나치게 정조 개인의 능력과 그의 죽음으로 인한 좌절에만 주목해 그 시대를 파악하는 오류가 있었다.

수원시 이달호(54) 학예연구사는 이런 관점에서 벗어나 화성 건설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재조명한다.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도서출판 혜안刊)'은 조선후기를 보는 미시적 틀 대신 정조의 평생 꿈이었던 화성건설과 그에 따른 노동력 동원, 물자조달이라는 기본 주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상품화폐경제에 대해 규정한 연구서이다.

이 책에 따르면 화성 건설은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시장 팽창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싹트고 있던 상품화폐경제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화성건설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신도시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한 마디로 18세기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 수준의 모든 면을 보여준 장이었다.

1794년부터 1796년 9월까지 이뤄진 화성건설 과정에는 초기에 약 4천명, 이후에는 2천명이 항시 화성에 머물면서 일했는데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의 임금지불은 도급제적 성과급제를 적용했고, 소요된 모든 물자는 거의 돈을 지불하고 사온 상품이었다. 그 당시에 가옥과 전답에 대한 철거보상을 돈으로 했다는 점도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2년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국가재정 1년분의 약 9분의1에 이르는 비용인 100만냥이 지출된 화성건설은 상품화폐경제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조선조 최대의 토목공사였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높은 상공업 발달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다.

수원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공부한 연구자가 발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책의 의미는 더욱 깊다. 활자로만 접한 역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화성'이라는 역사적 현장을 구석구석 찾아보고 체득하면서 얻어낸 체험의 산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