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배 (인하대 법대 학장·객원논설위원)
고환율, 고금리, 고유가. 불황이라는 우리경제의 어두운 미래를 말해 주는 단어들이다. 자고 나면 몇 %가 올랐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수치보다 절박하게 압박을 받는 이들은 서민들이다. 살림이 적자로 돌아선 지 오래되었지만 물가가 심상치 않다는 뉴스가 오늘도 판박이로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장바구니 현실과 동떨어진 뉴스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이미 돈이 마른 서민들은 우리 경제가 가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IMF와 비교해 보는 대폿집의 분노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장래를 예측하는 기준도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 '극장과 유흥 오락시설이 된서리를 맞을 것이다. 음식점은 파리를 날려도 동네 슈퍼의 술 판매량은 늘어날 것이다. 부동산에 붙은 폭탄 세금과 은행금리 때문에 서민들의 집에 경매딱지가 먼저 붙을 것이다'. 물론 학자들이 좋아하는 과학적인 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장감 때문일까. 오히려 사람들은 비과학적이라는 그런 기준에 더 귀를 기울인다.

여성들의 치마길이를 보면 경제상황을 알 수 있다는 개그 수준의 고전에서부터 출근길의 만원 전철상황에 이르기까지, 서민들이 생각하는 불황기준도 많다. 청년백수의 인터넷 접속 수, 로또의 판매율, 대학휴학생 증가와 군입대율 등 불황을 점치는 저마다의 기준은 늘어만 간다. 그리고 몽땅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온 손님을 맞이해 본 해수욕장 상인들은 이미 불황이 왔다고 믿고 있다.

불황의 지표로 술 소비량을 드는 사람도 있다. 분노가 클수록 그리고 살기 어려울수록 더 술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모든 공산품 소비가 줄고 있는 가운데 유독 술 소비만 늘고 있다. 7년 만에 줄었다던 술 소비량이 최근 다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에서 5월까지 소주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 맥주는 4.7% 증가했다고 한다. 환산하면 소주는 14억2천만병, 맥주는 14억5천만병 가량 팔린 셈이다.

그런데 반대로 최근 일본에서는 맥주시장이 축소되고 있다. 10년 전 20대 남녀의 56%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었던 맥주가 지금은 39%로 낮아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경제회복 때문일까. 아니다. 주된 이유는 맥주가 '너무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소주가 약해진 것도, 일본의 사케가 대량 수입되고 있다는 소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올 상반기 일본에서 수입된 사케는 물량으로 46%, 금액으로 74% 정도 급증했다. 수입 증가율에서 이미 프랑스산 포도주를 앞섰다.

급해진 것은 일본 주류업계다. 술보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레몬과 초콜릿 맛을 첨가한 '플레이버 맥주'와 '스위트 맥주'를 내놓았다. 쓴맛이 아니라 단맛의 맥주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3맥주를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젊은이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배려한 전략이 숨어 있다. 제3맥주의 주세는 캔당 28엔으로 맥주의 77엔보다 훨씬 저렴하다.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주세를 절약하여 더 값싼 제3맥주를 만든 것이다. 경제상황에 맞춰 술에서조차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내는 일본을 보면서 생각한다.

청년백수와 비정규직의 시대, 저출산과 고령화의 시대, 과연 우리들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개척하고 있는가. 미분양 아파트가 넘쳐나는데도 공장과 농토를 밀어내고, 신도시 건설에 열을 올린다. 일자리의 핵심인 산업단지 조성보다 그린벨트에 아시안게임 경기장을 건설하기 위해 안간힘이다. 실업자 숫자보다 경기장 좌석숫자를 더 걱정하고 있다. 정책이라고 발표되는 것마다 조자룡의 헌 칼 수준이다. 이래저래 술 마시게 만드는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