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선택진료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매우 높다. 선택진료비는 환자가 좋은 의사를 선택해서 치료를 받는다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하지만 그런 좋은 취지는 현실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선택진료비는 건강보험의 적용도 받지 않고 최소 20%에서 최대 100%까지 추가로 징수될 수 있기 때문에 환자에게 좋기는커녕 병원의 수입만 올려주는 '불합리한' 제도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보건복지부는 실태조사나 관리감독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국가와 병원이 결탁해서 아픈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현실에서 '선택의 기회'는 언제나 일정한 제약과 함께 다니기에 실질적인 선택을 가로막는 경우가 더 많다. 영화 '식코'에 나오듯 손가락을 절단당한 사람에게 이건 몇 만 달러, 저건 몇 만 달러라고 얘기하고 난 뒤에 어느 손가락을 접합하겠냐고 묻는 것이 과연 선택의 기회일까? 환자의 생명을 우선시하겠다는 선서는 간데 없고 노골적인 이해관계만이 병원을 지배하고 있다.
병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부조리한 선택의 기회들로 가득 차 있는데,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교육이다. 정부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 조기유학을 줄이기 위해 국제중학교나 자립형 사립고를 설립하고 고교선택권을 확대하겠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기를 원하고 그래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한다. 단, 그러려면 비싼 학비나 학원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서울대에 입학하는 아이들 중에서 자립형 사립고나 강남학교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얘기할 수 있다.
선택의 기회를 내세운 부조리한 사회적 조건들은 한국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지만 엄청난 집값을 치를 수 있는 능력자여야 한다. 누구나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뒤집어 생각하면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선택의 기회를 무조건 보장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골고루 분배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부조리의 뿌리에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믿고 사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원래의 모습대로 유지되고 있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는 없다. 사회정의나 평등을 위해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사회적인 조절과정을 거쳐 왔다. 권력이나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사회는 강자들에게 가르치며 약자를 보호해 왔다. 그런데 한국의 강자들은 그런 조절과정에 극열하게 저항하며 선택을 내세워 공공성을 희생해 왔다.
사회적 공공성은 기업처럼 무한경쟁으로 확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 살을 내어줘서 상대를 살리는 희생이나 정의로운 사회적 평등에서 확보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CEO대통령이나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여전히 영리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와 함께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폭도 덩달아 점점 줄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