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 (수원대 경상대학장·객원논설위원)
요즘 보수층 인사들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폄훼하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기득권 세력들이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어 혹독한 시련(?)을 겪은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후에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통치기간 내내 재벌 길들이기에 힘을 쏟았다. 무분별한 문어발 경영 규제와 투명경영을 담보하기 위해 계열사간 상호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부채비율 축소를 강요함은 물론 오너들에 대한 책임강화 차원에서 사외이사제 도입과 기획조정실 해체로 재벌들을 압박했다. 이 기간은 재벌들의 시련기였다.

노무현 정부는 한술 더 떴다. 동반성장을 구실로 양도세를 대폭 강화하고 자의적으로 책정한 고가(高價)주택에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하는 등 부동산 부자들에 무차별적으로 세금폭탄 공격을 감행했다. 도처에서 비명소리가 불거졌다. 집부자들은 자신이 마치 투기꾼 내지는 도덕적 해이의 전형으로 매도되는듯해 심기도 매우 불편했다. 부자는 물론이고 중산층까지 죽이는 것으로 해석했다. 덩달아 수도권도 유탄을 맞았다. 지방균형발전을 빌미로 수도권은 옥죈 반면에 막대한 세금을 지방과 경제적 약자들에게 쏟아 부었다. 결과는 장기간 내수 부진에다 집값이 폭등하고 양극화는 더 심화되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속설이 재확인되었다.

'9·1 감세대책'은 가히 슈퍼 메가톤급이다. 소득세·법인세·부동산세·상속세 등 세제 전반에 걸쳐 향후 5년간 무려 26조원을 깎아주는 내용이다. 당장 내년에만 11조6천여억원을 감세할 예정인데 이중 58%가 중산 서민층 및 중소기업에 귀착될 것이란다. 감세는 이미 예견되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불안에 대한 우려가 심한 터여서 매우 반갑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니 사회적 약자들에겐 속빈 강정처럼 보인다. 양도세와 종부세 부과기준 완화조치는 춥고 배고픈 서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수도권 외곽지역과 지방에는 2~3년 거주요건이 추가되어 변두리지역의 집값만 더 떨어지게 생겼다. 소득세도 일률적으로 2%씩 인하할 예정이나 저소득 계층에는 '코끼리 비스킷'정도이고 고소득자들만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 상속세 인하도 이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더욱 걱정인 것은 감세가 복지지출 축소로 연결되어 양극화 확대 및 사회갈등을 부채질할 공산이 크다. 떡고물에 비유되는 낙수효과(trickle-down)도 정부의 기대만큼 효과가 크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는 이번 감세조치로 잠재성장률이 0.6%이상 증가, 연간 18만명의 고용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국내 대기업들은 미래사업 발굴한계에 봉착해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 투자도 생산 및 사무자동화와 해외투자에 집중되어 국내고용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또한 빠른 고령화에 따른 저축증대 내지는 부자들의 한계소비 성향이 낮아 감세가 국내소비 증가로 이어질 개연성도 적다. 교육·의료·관광 등 국내서비스산업이 부자들의 눈높이에 못미치는 탓이다. 고금리 및 환율 불안 등 외부 요인도 경제활성화에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어쨌거나 부자들은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한 보따리 선물을 받아 표정관리하기 바쁘다. 절묘한 정책조합이다. 오죽했으면 이번 감세안을 접한 국토해양부 고위 공무원이 "부자들만 신나게 생겼다"고 소회를 밝혔을까. 보수언론들은 이 참에 아예 쇠말뚝을 몽땅 뽑아버리자며 여론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 잃어버린 10년동안의 고통을 보상받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감세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제반 경제자원들이 비용이 보다 저렴한 곳으로 몰리는 상황이어서 우리만 고고하게 조세형평 타령할 수는 없다. 규제완화에 대한 당위성이 충분하다. 외국인직접투자의 순유출도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정부가 앞장서서 사회갈등을 증폭시켜서야 되겠는가. 보복은 또다시 보복을 부르는 법이다.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보다 세련된 정책조합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