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중에 생각해 낸 것이 로스쿨 학원 방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들의 입시 때문에 학원에 간 적도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물론 학교 운영위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자식과 무관한 학교였다. 아들이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졸업하던 날. 처음으로 학교를 방문했다. 존경하던 학교 이사장님을 만났다. 자네 아들이 다니는지 몰랐다면서. 섭섭해 했다. 그러나 어쩌랴. 되돌아보았다. 내가 하는 교육방식이 옳은가. 눈 질끈 감고 수시 추천이라도 부탁할 것을 그랬나. 마음이 흔들렸다. 아내 또한 왜 이런저런 소문을 못 듣겠는가. 추천장 하나 못 받아 오는 부모에 대해. 갈등이 심했다. 그러나 상장을 만들어 대학에 갔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마음속으로 아들에게 말했다.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자체가 큰 행복이라고. 같은 또래의 학생들이 말한다. '학교는 없어져야' 한다고. 하지만 시골의 동창들과 대학을 간 사람이 열명도 안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제발 배부른 소리 좀 그만해라. 열심히 좀 살아라. 거침없이 대꾸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 그만하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학교는 학교다. 믿어야 한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과는 우려한 대로 끝났다. 주위의 눈길이 편치 않았다. 고상한 척 하더니. 맞는 말이다. 1년 후 결국 미국행을 선택했다. 나와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70년 중반까지도 시골에서 농사일과 새마을 운동을 했다. 당연히 고등학교에 갈 시기를 놓쳤다. 뒤늦게 겨우 검정고시에 합격을 했다. 되돌아보면 답답한 시절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광화문의 학원가도 다녔다. 그러나 학원에 대해 좋은 기억은 없다. 그러던 내가 결국 법학적성시험을 응시한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것도 학원으로. 원서 접수가 시작되는 10월 6일까지는 2주일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학원가 방문이냐고. 매서운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정작 나만큼 답답해했던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었다. 왜 로스쿨이냐고. 그 좋은 직장에. 일류대학에. 자격도 있는데. 그들이 말했다. 법조인이 꿈이라고. 나도 안다. 입시용 언어라는 것을. 되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불안하냐고. 말없이 답한다. 상담을 위해 몇 시간 기다렸다고. 내 눈빛에서, 내 입을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미래에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쟁률은 얼마일까. 3년후 이들을 모두 합격시킬 수 있을까. 다시 뛴다. 존경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원장으로 영입하기 위해서. 부자들만의 로스쿨이라는 비판에 맞서 파격적인 장학금도 새롭게 준비했다. 미국의 명문대 졸업생 어머니와 장시간 면담했다. 그가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당신을 통해 미래를 보았다고. 합격시켜줘야 한다고. 그냥 웃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극성부모라고도 한다.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자식에게 어떤 아버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