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것을 잃고 허수아비로 전락, 심한 말로 세비나 축내던(?) 국회가 제대로 된 기능과 권한, 특히 국정감사권을 되찾기까지엔 장장 16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한국정치의 암흑기라는 유신시대가 종말을 고하고도, 곧 이어 등장한 신군부의 독재정치를 한 차례 더 겪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국회의 노력으로 회복했다기보다는, 오로지 국민의 힘과 투쟁에 의해서였다. 1987년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났던 6월 민주항쟁 승리의 열매였던 것이다. 어렵사리 되살린 국정감사(이하 국감)는 그러나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만을 보여주진 못해왔다. 주요 정책의 방향과 성과에 대한 분석 평가를 통해 공론의 장에서 개선 논의가 이뤄지게 하는 등의 순기능보다는, 여야의 정치 선전장 내지는 폭로전에 육탄전까지 벌이는 저질 정치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지난해만 해도 일부 부처 감사에선 서로 상대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도덕성과 비리의혹 등을 앞세워 드잡이로 지새우곤 했다. 그러다 급기야 피켓이 날고 격렬한 몸싸움까지 벌였던 일을 국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긴 세월 항쟁 끝에 기껏 국민들이 힘들게 되찾아준 고유 권한을 국회는 그렇게 스스로 저버려왔던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노력과 힘이 아닌 남의 힘(국민의 힘)으로 되찾다 보니, 그 진정한 가치를 미처 인식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며칠 있으면 또 국감이 시작된다. 18대 국회 첫 국감이자 10년 만의 정권교체 후 처음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 국민의 관심이 높다. 하지만 이번 역시 소모적 신경전 폭로성 한탕주의 등 구태가 재연될 조짐이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아 우려 또한 크다.
우선 증인채택을 둘러싼 여야의 충돌이 불안을 가중시킨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권력형 친인척 비리자와 그간의 실정 및 혼란 책임자들을 대거 증인으로 채택, 당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겠다고 벼른다. 당연히 한나라당은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이에 맞서 참여정부 때 실세와 관료들을 불러 '잃어버린 10년'을 따지겠다는 태세다. 증인채택의 적절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서로간의 기싸움 샅바싸움 기미가 너무도 농후해 보인다. 마치 '참여정부 대 이명박 정부의 대리전'이라도 치를 모양새다. 이러다 이번 역시 폭로성 한탕주의 저질 정치쇼로 점철되지 않을까 괜히 조바심이 인다.
문제는 또 있다. 이번 국감에선 유난히 피감기관들의 자료제출 회피가 극심하다고 한다. 물론 어느 기관이고 자신들을 공격할 자료들을 선뜻 내주고 싶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요구 범위가 무차별적이고 너무 방만한 탓도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 추궁을 면해 보려는 몸사림이 보다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론 자료제출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데도 한 원인이 있을 것 같다. 기껏 밤새워 자료들을 준비해 봤자, 제대로 된 감사도 못하며 파행만 일삼는 경우를 흔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의원들 스스로 깊이 자성해 볼 일이라 하겠다.
원인이야 어디에 있든, 국감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선 피감기관의 협조가 무엇보다 필수다. 의도적 자료제출 거부는 그 자체가 국감을 부정하고 국민을 무시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유례없는 국제금융대란 및 그로 인한 민생위기, 북한발 한반도 정세불안 등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소모적 기싸움 및 저질 정치쇼나 바라보고 있을 여유가 없다. 모쪼록 제대로 된 정책국감 민생국감의 모범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래야 출범 초 한동안 빈둥대며 세비만 축냈던 빚을 조금은 갚을 수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