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개토대왕비와 비석을 감싸고 있는 비각의 모습. 중국이 본래 비각(碑閣)을 철거하고 중국식 비각으로 대체했다.

만주 땅은 너무도 광활하고 드넓었다. 옆 도시로 이동하는 데도 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만큼 시간이 흐를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루함을 덜기 위해 곧잘 노래판이 벌어지곤 했는데, 가이드인 박정일(26)씨가 들려준 흘러간 옛 노래, 옌볜가수 김성삼의 노래 '타향의 봄'은 고국에 대한 조선족 동포들의 향수를 담고 있었다.

"봄이 왔다고 제비들도 고향에 갔으련만/ 고향으로 가고파도 갈 수 없는 이 사연아/ 그 누가 들어주랴 타향의 슬픈 노래를/ 구름너머 나는 새야 정든님께 전해다오."

옌볜사학자 안화춘씨는 "현재 해외에 나와 살고 있는 한민족 700만명 중 200만명이 중국에 있다. 그런데 우리 얼과 문화를 지키는 민족 중에 재중 동포만한 사람이 있을까"라고 말했다. 중국의 거대 용광로같은 중화사상이 칭기즈칸의 몽고족과 청나라 만주족을 녹여버렸지만, 조선족의 문화만큼은 녹여내지 못했다. 중국 지린성 투먼시 밀강 퉁소축제, 룽징 소싸움, 안투현 장흥촌 농악축제, 왕칭현 배초구 상모춤 축제 등이 매년 개최된다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옌볜은 그늘이 짙다. 조선족 사회는 공동화(空洞化)됐다. 경제적인 피폐함은 조선족 가족들의 이산(離散)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쇠퇴와 한족의 옌볜 진출은 옌지 시내에서 금방 확인됐다. 옌지 시내 음식점과 발마사지 업소에서 만난 종업원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정도상의 소설 '찔레꽃'에도 이 같은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서울에 있는 영출의 어머니는 삼년동안 식당에서 벌어모은 돈을 모두 사기당하고 지금은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중략)금산촌에서 석하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들판이 황금물결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황금물결은 거의 한족 농부들의 것이었다. 한국바람이 분 뒤로 금산촌의 조선족은 농사를 멀리했다. 그전에는 한족 마을인 석하촌보다 농사를 훨씬 많이 지어 부촌으로 이름이 드높았는데 지금은 쪼그라들고 말았다. 한국바람은 젊은 여자들을 마을에서 실어내갔다. 그 바람에 조선족 마을은 텅 비었다. 젊은 여자는 물론이고 마흔넘은 여자들까지 돈을 벌겠다고 모두 빠져나갔다. 조선족 마을에는 남자들만 남은 셈이었다."

▲ 경기민예총 문화예술탐방단은 지난 9월 4일 고구려 천리장성 건안성을 방문했다. 중국측의 관리소홀로 성곽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림은 류연복 경기민예총회원의 건안성 스케치.


이는 '한국색 배제'와 '중화' 작업을 급속히 진행시키고 있는 중국정부의 정책도 한몫한다. 민족 영산인 백두산은 2005년 옌볜 조선족자치주로부터 분리돼 지린성 산하 창바이산 보호개발구 관리위원회 직할로 바뀌어 있어서 한글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보러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비에 절을 하려던 일행이 현지관리인에 의해 제지당했고 심지어 '경기민예총 문화예술탐방'이라는 현수막을 펼쳐 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려 하자 현지 조선족 가이드가 질색하며 "중국관리인이 보면 큰일난다"고 현수막을 빼앗기도 했다. 중국 측의 이 모든 조치가 한국의 민족주의 감정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만주 여행전문가 박상욱씨는 "고구려 천리장성도 예외는 아니다. 흔히 여행 상품화된 고구려 비사성, 박작성 등은 이미 중국 동북공정화된 곳이고, 그 외 안시성, 건안성을 가려고 하면, 중국쪽 여행사의 방해공작이 하나 둘이 아니다. 외교사회적으로 이슈화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2년 전만 해도 안시성은 한국인은 공식적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안시성 입구 안내문으로 한국인 출입금지라 쓰인 녹슨 푯말이 있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인터뷰 / 최삼룡 前 옌볜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장

"고향 떠나도 정체성 지켜야"

최삼룡(69·사진) 전 옌볜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장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것이 조선족 사회의 제일 큰 위기라고 전했다. "룽징시의 경우 아이와 부모 모두 함께 살고 있는 가정이 34%밖에 안 돼요. 다들 베이징, 상하이 같은 큰 도시나 한국으로 일하기 위해 가족품을 떠나는 거죠." 최씨는 그도 그럴 것이 룽징시 조선족의 생활수준은 중국 평균수준에도 많이 못 미치고 제대로 타지 못한 노임도 제일 많은 시가 바로 룽징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한족에게 땅을 팔거나 아예 방치한 채 해외나 큰 도시로 이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상들이 피땀 흘려 일군 만주 땅이 한족에게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마을을 떠난 이들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리는 만무하다.

최씨는 "조선족은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의 중국 진출에 적극적인 가교(架橋)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향후 남·북 관계 혹은 남·북 통일 이후 전개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이들이 흩어지거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사진제공·후원=경기 민예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