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 (수원대 경상대학장·객원논설위원)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명심보감에 나오는 어구로 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다는 뜻이다. 즉, 물속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려야 어종도 풍부하고 개중에는 잉어나 가물치 같은 큰 고기들도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원래는 성정(性情)이 곧고 시시비비를 잘 가리는 사람 주변엔 친구들이 꼬이지 않음을 경계한 말이나 사회가 적당히 부패하고 혼탁해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오늘날 세계경제가 이만큼 이나마 발전하게 된 것이 양의 탈을 쓴 자본주의 덕분이라고 평가하는 데 이론(異論)을 제기할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특유의 역동성과 유연성에 기인하고 있는 바, 그 기저에는 자유방임과 경쟁원리가 버티고 있다.

미국정부는 1980년대부터 새로운 경제실험을 했다. 과감한 규제완화와 감세로 대표되는 공급측 경제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고 그 중심에는 금융산업이 자리매김했다. 투자은행들이 첨병역할을 했는데 이로 인해 미국은 또 한 차례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것이다.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 등 월가의 빅브라더들이 각국의 금융소비자들을 경쟁적으로 금융자본주의 정글로 끌어들인 탓이었다. 투자은행은 현대판 미다스의 손이었다.

외환위기 이래 국내경제는 중병에 시달렸다. 수출은 꾸준히 신장되었으나 점차 속 빈 강정으로 전락해갈 뿐만 아니라 내수는 게걸음질을 지속함으로써 성장동력 약화 내지는 사회양극화만 확대재생산되었다. 다급해진 정부는 경제성장 모델을 일본형에서 미국형으로 전환, 동북아 금융허브를 슬로건으로 상업은행의 대형화 유도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통합법)을 제정했던 것이다. 이 법은 증권업, 선물업, 자산운용업 등의 칸막이 제거를 통해 한국판 빅 브라더를 육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별도의 은행거래 없이도 금융투자회사에서 직접 송금, 카드대금 결제, 공과금 납부 등을 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주식, 펀드, 파생상품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일괄 취급할 수 있도록 했다. 법에 규정돼 있지 않은 상품의 판매도 허용하고 있어 앞으로는 각양각색의 금융상품들이 대거 선보일 전망이다. 키코, 스노볼과 유사한 위험천만한 상품출시도 예견된다. 300여개에 달하는 자본시장 관련 규제건수도 190여건으로 대폭 축소된다. 자통법의 본격적 시행을 6개월여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마무리작업에 한창이며 삼성증권, 한화증권, 동부증권, 동양종금 등은 새로운 부(富)의 축성을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교롭게도 국내 자통법 발효에 임박해서 미국발 금융위기가 불거졌고 그 중심에 리먼 브라더스, 메릴린치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리먼 브라더스 등은 생면부지의 각종 파생상품을 대량으로 쏟아내 멍청한(?) 전 세계 금융소비자들을 끌어들임은 물론 차입금의 무려 30배에 달하는 레버리지로 사상누각을 건설했던 것이다. 엉성한 감독시스템과 부패한 투자은행들의 탐욕이 빚은 참극이었다.

자통법 시행의 연기 내지는 대폭손질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민주당 등 야당은 물론 한나라당 내에서도 신중을 주문하는 형국이다. 심지어 미국 금융학계 원로인 조지 워싱턴대학의 박윤식 교수마저 "한국판 골드만 삭스나 메릴린치 육성전략은 전면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자통법 시행을 힘으로라도 밀어붙일 태세이다. 그리곤 우려를 표명하는 국민들의 고언(苦言)을 반대를 위한 반대로 치부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 금융시스템이 명백한 실패임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이를 모델로 한 자통법 시행을 서두르는 정부의 속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한동안 세계 금융시장은 혼미를 거듭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선진국들의 금융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손질도 점쳐진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가닥이 잡힐지 전혀 가늠되지 않는데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기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하는 법이다. 자통법과 금융선진화 작업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