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경한 용어가 우리 사회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였다. 직접적 원인은 대외결제용 외환의 턱없는 부족에서 비롯됐으나 대마불사의 신화에 도취한 재벌들의 무분별한 차입경영이 단초를 제공했으며 배후에는 은행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은행들은 해외에서 단기의 저리자금을 융통, 높은 금리로 재벌기업들에 몰아주는 수법으로 초과이윤을 누렸던 것이다.
미스매칭에 대한 우려가 점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은 심지어 만기 3일짜리 초단기 외채까지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은행들은 외국투자자들의 '셀 코리아'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경상수지 적자누적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IMF 관리체제로 전환과 함께 비롯된 살인적인 고환율과 고금리, 주가 대폭락은 수만 개의 중소기업과 30대 재벌 3분의 1이 파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재벌들에 뒷돈을 대다 덜미가 잡힌 서울은행·제일은행·외환은행·조흥은행 등 간판급 시중은행들은 줄줄이 헐값에 매각되는 수모(?)를 겪었으며 상장기업 대부분이 외국자본의 수중에 떨어졌다. 가까스로 사경(死境)을 넘긴 재벌들은 윤리경영을, 은행들은 도덕적 해이의 근절을 국민들에 약속했다.
외환위기가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무분별한 차입경영과 외환부족으로 혼쭐났던 기억 탓에 상장기업들의 부채비율은 현저하게 낮아지고 외환보유고가 2천400억 달러에 이르는 등 지표상으로는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리 편치 못하다. 세계금융위기의 여파가 우리에겐 유독 커 보이는 탓이다.
최근 몇 달 동안의 경상수지 적자행진도 한몫 거들었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은 우리 은행들의 막가파식 여신경쟁에 있다. 외환위기 때 기업대출로 혼쭐났던 은행들은 대신 가계대출에 주력했다. 또한 은행들은 부동산 불패신화를 부추기며 건설사와 야합, 대규모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통해 부동산버블을 키웠다. 그 와중에서 은행들은 단기저리의 외채를 대거 국내로 끌어들여 고리의 장기대출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성찬(盛饌)을 즐겼다. 덕분에 2005년 말 1천879억달러이던 외채가 현재 3천807억달러로 불과 2년 사이에 두 배 이상 불어났는데 이 중 단기외채가 40%를 상회, 외환위기 당시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도덕적 해이를 근절하겠다는 은행들의 대국민약속은 허언(虛言)이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정부가 급했다. 은행들의 달러빚 보증은 물론 사상 최초로 은행채를 매입해 주며 유동성비율을 대폭 완화시키고 미국과 원·달러 스와프협약 체결도 성사시켰다. 일단 급한 불은 끈 듯하다.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나 쇼크요법의 약발이 일단 시장에서 먹혀들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하다. 메가톤급 지뢰가 어디에 얼마만큼 숨어 있는지 가늠되지 않는 터에 국내 실물경기의 침체가 본격화되는 때문이다. 시장안정대책들이 초래할 향후의 부작용도 주목거리다.
지금으로선 글로벌 금융태풍의 피해가 최소화되기만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은행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하다. 지난 외환위기 때 무려 160조원의 세금투입을 통해 회생시켰던 국민들의 은혜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국민들이 언제까지 은행의 봉 노릇을 해야 하나. 감독을 소홀히 한 정부도 문제이나 금융권의 책임이 더 크다. 은행들의 고질적인 도덕적 해이는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