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개·폐회식을 연출해 세계인들로부터 찬사와 갈채를 한 몸에 받은 장이모우(張藝謨)감독의 홍등(紅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인은 옛 연인을 잊지 못하고 밀회를 계속하다가 둘째부인의 고자질로 결국 목숨을 잃게 되는 것으로 홍등은 막을 내리지요. 사실 장 감독은 90년대 초 까지만 해도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중국에선 그의 영화가 상영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역량과 예술적 감각으로 영화를 통해 국제적으로 명성을 드높이게 됩니다. 붉은 수수밭이나 영웅, 연인, 홍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아낌없는 사랑과 격찬을 받아 왔습니다. 중국 정부도 그의 뛰어난 예술적인 열정과 발군의 기량을 높게 평가해 올림픽 개·폐회식 총 연출이라는 중책을 맡기게 된 것이지요.
그는 올림픽의 정점인 개·폐회식을 통해 세계인들을 감동시켰고 중국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그가 영화로도 이미 유명해진 홍등을 발레라는 장르로 탈바꿈시킨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그동안 중국의 발레는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세계적으로는 그리 각광을 받지 못해 왔지요. 그는 홍등을 통해 이러한 국제적 인식을 불식시키려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 발레가 서양 발레와는 또 다른 차원의 창조성과 작품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적인 면이 엿보인 것이지요.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고 때로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흐르는 음악과 경극이 가미된 발레 홍등은 새로운 시도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요란하지 않고 현란하지도 않으면서 잔잔한 물결과도 같고 휘몰아치는 파도나 구름이나 태풍이나 천둥 같은 무용수들의 춤사위는 환상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셋째부인이 된 첫날 밤 남편의 손길을 거부하려는 여인을 강제로 범하는 대목에서 커다란 붉은 천으로 덮인 공간을 이용한 암묵적 연출기법도 인상적이더군요. 남녀 주인공이 죽음을 앞두고 절규하며 요동치다가 막을 뚫고 뛰쳐나오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고 중국의 발레가 저 평가되었던 세계의 장벽을 박차고 나온듯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얀 벽에 몽둥이를 휘둘러 빨간 피가 튀기는 형상화된 기법으로 그 들의 죽음을 암시한 것도 나름 돋보이더군요. 비록 홍등이 계림 양삭에서 본 수상 오페라 인상. 유삼저(印像. 劉三姐)와 베이징올림픽 개·폐회식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장이모우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 역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서양발레를 모방하는 수준의 발레가 아니라 전통문화를 접목시킨 창작발레를 선보였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도 장이모우와 같은 저력 있는 예술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것이 최고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한번쯤 곱씹어볼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불그레하게 저물어가는 가을이 홍등으로 인해 저녁노을처럼 더욱 붉게 물들었습니다. 홍등의 따뜻한 불빛아래 은은하고 감미로운 선율과 삶의 질곡을 보여준 몸짓과 영혼을 기억해보세요. 우리 겨울은 결코 춥지도 외롭지도 않고 포근하고 넉넉한 겨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