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가 그리는 동성애의 모습이 달라졌다. 2002년 '로드무비'의 포스터에 실린 홍보문구는 "불편한 사랑이 시작됐다"였지만 2008년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포스터의 문구는 "케이크와 남자는 맛을 봐야 안다"로 발칙해졌다.

   어둡고 우울한 사회적 족쇄로 그려졌던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본격 상업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한다. 동성애 색채가 짙은 '퀴어 영화'는 일부 마니아층에게나 호소할 만한 저예산 영화라는 인식을 깨뜨린다.

   ◇2000년대 한국 동성애 영화들 = 동성애를 다룬 한국 영화들은 이미 2000년대를 전후로 많이 나왔다.

   199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민규동 감독의 '여고괴담-두 번째 이야기'는 여고괴담을 푸는 열쇠가 여자 동급생들의 사랑이었고 2001년 '번지점프를 하다'는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남자 교사와 남자 제자 사이의 사랑과 주변의 오해가 큰 줄거리였다.

   2002년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는 동성애자의 사랑을 진지하게 전면에 부각하면서 파격적인 동성애 장면을 집어넣어 대표적인 본격 동성애 영화로 꼽히며, 민규동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년)에는 냉정한 사업가와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남성 파출부의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2005년 말 개봉해 1천만명 이상을 동원한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 역시 여장 광대 공길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였다.

   이해영ㆍ이해준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2006년)는 여자가 되고 싶어 씨름으로 수술비를 마련하려는 소년이 주인공이고 이희송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2006년)는 저예산 영화로는 보기 드문 성공을 거뒀다.

   ◇좀 더 밝게, 좀 더 일상적으로 = 올해 말 개봉하는 영화들은 동성애를 일상적인 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꽃미남 배우들을 내세워 음침하지 않게 밝은 색깔을 입혔다.

   13일 개봉한 민규동 감독의 '앤티크'의 주인공 선우는 '어떤 남자든 넘어오게 만드는 마성의 게이'로 설정됐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발랄하고 상큼하며, 선우를 둘러싼 동성애 이야기도 유쾌하다. 선우의 주변 인물들도 선우를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선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전작 2편에서도 동성애 코드를 살렸던 민규동 감독은 "동성애 문제는 내 머릿속에서 계속 진화하고 있다"며 "이번에는 좀 더 뻔뻔하게, 자연스럽게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는 남자 배우들간의 진한 키스신을 집어넣었으나 무사히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끝낸 수험생들의 지지를 얻어 각종 영화 예매사이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저예산 단편영화라는 한계에도 20일 정식으로 극장 개봉하는 '소년, 소년을 만나다'도 '샤방샤방 첫사랑 퀴어 로맨스'라는 홍보 문구가 잘 어울리게 밝은 톤을 유지한다.

   청춘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우울한 이야기를 상상하기 쉽지만 미소년 민수(김혜성)와 석(이현진)의 만남을 다루는 이 영화는 청소년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첫사랑을 찾아 나가는 모습을 그린다.

   김조광수 감독이 밝힌 연출의도 역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관객들에게 소수자에 대한 애정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12월 30일 개봉하는 '쌍화점'은 두 영화와는 달리 동성애를 '치명적인 사랑'으로 그리지만 대표적인 미남 배우들을 기용했고 동성애가 극중 전개에 중요한 코드가 되는 경우다.

   고려 왕(주진모)이 호위무사(조인성)에게 애정을 느끼는 상태에서 원나라 왕비(송지효)를 맞아들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주진모와 조인성이 동성애 관계가 된다는 점에서 기획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고 이들의 애정신 수위도 궁금하다.

   ◇아직은 '중간 단계' = 영화들의 변화는 분명하지만 이 영화들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영화 관계자들은 예전보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좋은 요소가 될지, 거부감부터 일으키는 흥행 악조건이 될지는 아직은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꽃미남들을 동원한 동성애 영화들이 진정한 동성애 코드를 담은 것은 아니며 일부 마니아층에게 어필할 뿐이라는 지적도 여전하다.

   영화 평론가 황진미씨는 "동성애의 금기를 푼 영화인 '왕의 남자'에는 실제 동성애 장면이 등장하지 않고, 민규동 감독의 전작인 여고괴담-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동성애를 비극으로 귀결하고 있다면 '앤티크'는 관객이 부담감없이 볼 만하게 동성애를 그린다"며 "한국영화가 저변을 확대해 가는 중인 것은 분명하다"고 풀이했다.

   황씨는 그러나 "누구에게나 관심거리인 멜로의 구도 안에서 여러 시도들이 나오는 가운데 동성애나 남장여자의 사랑도 등장하게 된 것이며, 권력지향적인 남자 캐릭터에 질린 여자 관객들의 바람이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며 "꽃미남들을 동원한 멜로인 야오이물을 넘어서 본격적인 동성애 영화가 만들어질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