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게재 이후 책을 출간하기 위한 편집작업 과정에서 말 그대로 역사적인 일이 많이 있었고, 이 책에서는 그 일까지 담았다.
대표적인 게 사진 한 장도 전해지지 않아 연구자들의 애를 태웠던 인물의 사진을 얻게 됐다는 점이다. 행적조차 알 수 없었던 항일운동가 유두희(劉斗熙·1901~1945)의 사진은 물론 가족까지 찾을 수 있었고, 개항기 대부호 서상집(徐相集·1845~1912)의 얼굴도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미국에 사는 서상집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기사를 보고 할아버지의 얼굴이 담긴 유일한 한 장의 사진을 전해준 것이다. 특히 출판을 위한 자료수집 과정에서 근대 인천 정신의 뿌리라고 할 만한 서예가 취은(醉隱) 김병훈(金炳勳·1863~?)의 사진과 작품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런 점이 바로 인천 인물사 연구에서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창수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유두희, 서상집, 김병훈은 근대 인천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가치를 지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진 한 장 전해지지 않았다"면서 "경인일보의 기획특집과 책 발간으로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성과를 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기획 특집 이후 그늘에 가려 있던 몇몇 인물들은 햇빛을 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가 유두희가 2008년 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유두희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인천지역 독립운동가이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항일운동 조명작업에서 철저히 배제돼 왔다.
유두희는 1901년 강화에서 나 어렸을 때 인천으로 이사왔으며, 19세 젊은 시절부터 청소년운동을 벌이고,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활동, 노동운동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 열린 1946년 5월 1일의 노동절 기념식에선 표창도 받았다.
유두희는 철저히 묻혀 있었다. 후손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그가 인천 최초의 공산당 결성에 관여하고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 때문이었다. 경인일보 보도로 유두희의 아들이 인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과정에서는 사진자료까지 구할 수 있었다.
유두희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던 '상해임시정부의 교통부 참사 윤응념', '만주지역 독립운동가 유완무' 등의 인천인물도 새로운 평가가 가능해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에 조사결정을 내린 것이다. 진보당을 창당했던 죽산 조봉암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에 있던 자료가 '고향 인천땅'을 밟는 극적인 경우도 있었다. 개항기 인천의 대표적 부호였지만 관련 사진자료 하나 남아 있지 않았던 서상집의 인물사진 1장이 2008년 7월 미국에서 인천으로 건너 온 것이다. 미국에 사는 서상집의 손자인 제임스 서(68)씨가 가족들이 유일하게 보관하고 있다는 전신 사진 1장을 가져왔다.
그를 경인일보가 보도할 때(2004년 10월21일)만 해도 서상집과 관련한 사진은 커녕 사망연도도 확인할 수 없었다.
손자 서씨는 "큰아버지(서병의) 가족이 중국 톈진에서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15일에 몰살을 당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그리고 같이 살던 아들 2명과 딸 1명 등이 한꺼번에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는 얘기도 했다. 그는 또 "큰아버지는 2층집 계단에서 내려오는데 총살당했고, 큰어머니와 사촌 형제들은 칼로 당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인천인물 100인은 인천의 인물사전이자 평전(評傳)으로 쓰임직하다. 그리고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난 한 세기 인천의 속사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집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