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사숙은 1908년 취은이 지금의 창영초등학교 강당 부근에 설립한 글방으로, 한학과 동양화 등을 가르쳤다. 검여, 우현은 여기서 예술혼을 키웠으며, 판결문의 한글화를 이룩한 조진만은 취은에게서 민족의식과 청렴성을 깨쳤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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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은의 아들 김상규씨가 운영한 신식 한의원인 대제원. 취은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
취은의 앉은 모습을 담은 사진틀 하단에는 나가노사진관이라고 적혀 있다. 손자 며느리 홍사숙씨는 "나가노사진관은 (일제강점기에) 중구청 앞에서 일본인이 운영한, 유명한 사진관이었다"고 전했다. 사진 속 취은은 오른팔을 원형 탁자에 기댄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다. 사진으로도 고고한 선비의 풍모가 여실히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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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은이 신유년(1921년)에 그린 문인화. |
취은은 말년을 대제원 지수재(芝壽齋)란 서재에서 보냈다. 취은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 생을 마감했다고 후손들은 전했다. 대제원 사진의 발굴도 전문가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그동안 말로만 전해지던 대제원의 초창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없어 전문가들은 속을 태웠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이번에 사진과 작품 발굴로 그동안 더디게 진행된 취은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