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하 (시인)
세상을 바둑판이라고 부른 사람은 여럿일 것 같지만 내 기억에 분명히 남는 이는 19세기의 한국 후천개벽사상가였던 강증산(姜甑山) 선생이다.

선생은 오선위기(五仙圍碁), 다섯 신선이 두는 바둑판으로 한반도의 현대를 예언한 바 있다. 네 신선은 중국, 일본, 미국, 소련이고 나머지 한 신선은 한국이겠다. 그런데 이 주인신선은 현대 100년을 내내 한 수도 쓰지 않고 네 신선의 복잡한 바둑판을 꼼짝 않고 구경하다가 끝내 네 신선이 판을 끝내고 제 집으로 돌아간 뒤 그 복잡다단한 바둑수를 몽땅 제 것으로 만들어 세상에 다시 없는 웅숭깊은 바둑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4강의 바둑판은 과연 어떠한가? 재미가 있건 없건 간에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꿰뚫어 알려면 이 판만 잘 들여다보면 훤히 다 알게 되어 있다. 그만큼 세계와 지구의 온갖 사정이 다 압축돼 있는 곳이 한반도와 그 주변 동북아시아 태평양지역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한때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호츠크해를 지나 캄차카반도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항구 맞은편의 풀언덕 미센나야쇼브카에서 바라본 아바차만의 광경이다. 그 광경은 내게 9천년에 걸친 몽골리안 루트의 유목 이동의 근원적 동기가 다름 아닌 보다 더 거대한 호수가 있는 보다 더 거대한 산을 찾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일으켰던 것이다.

보다 더 거대한 호수가 있는 보다 더 거대한 산이 뜻하는 것은 내게는 보다 더 거대하고 풍요한 신시(神市), 바자르였다.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장바닥은 반드시 산 위의 물가에 섰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웃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다음 말을 듣고 나면 아마도 그 웃음이 곧 등골의 오싹한 소름으로 변할는지도 또한 모르겠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키르기즈스탄의 1천500m 고지의 이쉬쿨 호숫가에서 열리는 '야르마르크'라는 국제바자르는 이천사오백년의 역사를 가졌음에도 그 상품의 수다한 종류와 내용의 풍요로움, 거기 모여드는 먼 유럽과 아시아, 남아메리카 및 호수에서까지 모여드는 상인들의 그 애틋한 정다움과 놀라운 가격 다양성, 교환의 엄격함 속에 스며있는 착한 이웃사랑의 호혜(互惠)의식의 철저함에 놀라지 않는다면 그는 단 한 번도 저 냉혹한 현대시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마르칸드의 비비하눔 성전 앞마당에서 열리는 바자르의 그 거룩한 활력과 베트남의 고도(古都) 후에시의 동바시장의 그 획기적 재분배의 놀라운 일대풍광 등은 참으로 현대성을 높이 자랑하는 대도시의 저 수많은 백화점, 몰, 마트, 그리고 대형 배급 시장을 거대한 수치심 속에 몰아넣기에 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라고?' '주식시장이라고?' '부동산 거품이라고?' '허허허 거 다 뭣하는 짓인고?'

이렇게 된다. 인류는 이제야 자기의 과거가 가진 여러 참다운 가치에 눈뜨기 시작한다. 착한 경제, 따뜻한 자본주의, 부자세 신설, 호혜시장, 민중은행, 사회적 기업, 포트라치, 품앗이, 공정무역 등. 그런데도 몽골리안 루트 9천년은 어찌해서 보다 더 거대한 물이 있는 보다 더 거대한 산 위의 보다 더 거대한, 그리고 보다 더 냉혹한 시장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 것인가?

대답은 나보다 이 글을 읽는 여러 독자들이 더 잘 안다. 이윤, 초과이윤을 찾아서다. 그래서 그 끝은 무엇인가? 그 이동의 맨 마지막 완성점이 마야문명일 터인데 마야달력의 종말은 몇 년인가? 2012년이다. 몽골리안 루트의 미래는 향후 3년 안에 끝이다.

어찌 생각해야 할까? 나에게 한 수 바둑을 두라면, 그리고 네 신선이 두던 온갖 바둑수를 엮어 한판 웅숭깊은 새 문명의 달빛을 가리키라면 이렇게 하겠다. 세계 사람이 다 모이는 이 한반도에 저 '야르마르크'같은, '동바'같은, '비비하눔 바자르'같은 우리의 옛 정다운 오일장(五日場)을 크게 걸찍하게 한바탕 열어 그 이름을 감히 '신령한 시장' 즉 '신시'라 붙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