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구 (수원대 경상대학장·객원논설위원)
요즘 들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종종 매스컴에 등장한다. 지난 2월 12일에는 서울 강남의 한 고급식당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달 20일에는 서울 힐튼호텔에 나타났다. 옛 대우그룹 경영진들과의 만남이 잦아진 탓이다. 대우그룹의 부활소식과 맞물려 있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되는데 죄수복을 입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으나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그는 1999년 10월 중국에 출장간다며 해외로 도피했다가 2006년 6월에 귀국, 사기대출 등으로 구속되어 징역 8년6월에 추징금 17조9천여억원을 선고받고 1년 남짓 복역하다가 2007년 12월 특별사면되었다. 덕분에 국민들은 대우그룹 부채 60조원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는데 변제방식은 변종 국민혈세인 공적자금이었다.

바야흐로 세계 각국은 불황과의 전쟁이 한창인데 무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공적자금이다. 미국은 벌써 7천650억달러를, 유럽은 2천240억달러를 각각 쏟아부었으며 일본은 10년 전 금융위기 때보다 8배나 많은 규모의 공적자금을 조성해 놓고 한계상태로 내몰린 은행들에 수혈 중이다. 지금까지 주요국들이 금융기관에 투입한 공적자금만 무려 100조엔으로 원화로 환산하면 1천560조원에 달해 우리나라 국민총소득(GNI)보다 훨씬 크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정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전이되면서 새로운 부실들이 자꾸 불거지는 때문이다. 작년 9월 리먼브라더스에서 시작된 화재가 급작스럽게 산불로 번지다 보니 잔불들이 충분히 진화되지 못했던 것도 이유다. 내달 2일 영국 런던에서 개최되는 G20정상회의의 주요 화두도 경기부양을 위한 세금투입이 될 예정이다.

우리나라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선제공격한다는 목표하에 총 40조원 규모의 구조조정자금 마련 방침을 확정했다. 지난 외환위기 때 조성한 부실채권정리기금 21조6천억원보다 2배나 크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은 아닌지 확실치 않으나 이번 사태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심각하다는 증거이다.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공적자금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양극화 확대 및 비정규직의 폭발적 증가란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은행에는 BIS비율 확대와 대출규제를 그리고 대기업들에는 구조조정과 부채비율 축소, 유동성중시 경영 등 펀더멘털을 강화했다. 그 결과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6개월여 지속하면서 불황의 골이 점점 깊어져도 우리경제는 아직까지 잘 버텨내고 있다. 만약 외환위기란 혹독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국민 대다수는 연옥(煉獄)에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속설이 입증된 셈이다.

세계 각국이 대규모의 공적자금을 조성, 구조조정에 팔을 걷어붙인 이상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세계적 불황과의 전쟁 종식시기가 머지않아 보인다. 그러나 공적자금은 국민들의 혈세로 조성된 만큼 특정기업들의 부실을 국민들이 통째로 떠맡아야 하는 부담에다 자금 투입과정에서 빚어질 도덕적 해이도 만만치 않아 보여 마음이 편치 못하다. 지난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보여준 부실기업인들의 도를 넘는 부정과 비리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엄청났다. 비위사실을 적발해서 법의 심판대에 세워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멀쩡한 비리기업인이 죄수복만 입으면 별안간 중환자로 둔갑, 병보석 및 특별사면으로 중도에서 풀려나지 않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처럼 땡전 한 푼 없는 알거지로 행세해서 사법부의 체면만 구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시 환란초래와 직접 관련이 있었던 경제관료들에 대해 정책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은 점도 기이하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장수만 국방부 차관,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 등은 MB정부 들어 화려하게 컴백해서 또다시 국민경제를 주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 5·18 광주사태처럼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묘한 일이 재연되었던 것이다.

10년 전 외환위기의 아픈 상처가 도지지 않도록 철저한 관리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