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대 도시, 최고의 부자도시로 이름난 성남시를 지칭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들이다. 경북 울릉군(1천110억원)에 비해 무려 20배 가까운 예산규모로 타 지자체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곳이 바로 성남이다. 그러나 이처럼 화려한 수식어의 이면에 전체 시민의 절반 이상이 시골 면소재지에나 어울릴 저층 노후건물에서, 또 소방차도 진입하지 못하는 산꼭대기 달동네에서 수십년간 눈물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40년 세월 주민들을 옭아매고 있는 고도제한의 어두운 그늘 때문이다.
■ 빈부격차를 넘어선 민-민갈등
분당이 정부의 200만호 건설계획에 따라 화려하게 등장한 신도시라면, 수정·중원구는 지난 68년 서울 청계천 개발에 밀려 집단 이주한 철거민들에 의해 즉흥적으로 탄생한 서민형 도시.
각종 기반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본적인 주거환경 또한 하늘과 땅 차이다. 인구 43만의 분당에 서울대병원과 차병원 등 모자람 없는 초현대식 종합병원이 3개나 있는 반면, 51만명의 수정·중원구에는 달랑 1개 뿐이다. 신도시에 8곳에 달하는 백화점·대형마트도 구시가지에는 1개뿐이고, 공원 역시 138대85(수정66, 중원19)로 '게임'이 안된다. 분당에서 도심을 가로질러 구시가지에 다다른 운전자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롤러코스트 언덕길, 시장통 골목길과 갑작스레 맞닥뜨리며 말그대로 천당과 지옥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된다.
이 때문일까, 수정·중원구 주민들은 '구시가지'라는 명칭 자체에도 거부감을 나타낸다. 대신 '본시가지'라는 표현을 고집한다. 대다수 신도시 건설지역이 공통적인 신·구 갈등을 겪게 마련이지만 성남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빈부격차에서 나오는 상실감을 넘어 분당을 바라보는 구시가지 주민들의 정서는 차라리 박탈감, 분노에 가깝다.
■ 구시가지 주민들의 애환
지난 23일 오후 수정구 태평2동 K아파트. 6개동 494세대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각각 56, 59, 66, 69㎡ 형으로 구성된 서민 아파트. 그러나 말로만 아파트일 뿐, 외벽 콘크리트는 곳곳이 금가고 떨어져나가 시골의 폐가를 방불케 했고, 일부 동은 한눈에 보기에도 심하게 기울어 금방이라도 붕괴될 것 같았다. 생활폐수가 지나는 하수관의 누수로 지하에 물이 차, 1주일에 한번은 꼭 물 퍼내기에 나서야 한다. 올해 22년이 된 이 아파트는 이미 지난 2002년 안전진단에서 D급을 받았다. 대표적 달동네인 은행동 지역은 사정이 더하다. 철거민 1세대 최모(71)씨는 2m남짓한 골목길을 따라 판잣집이 벌집처럼 붙어있는 이 곳에서 겨울이면 오지 않는 아랫동네 연탄 배달을 사나흘씩 기다리며 40여년을 살아왔다. 그는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달동네 사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불이라도 나면 동네전체가 줄초상이 날 것'이라는 두려움만이라도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시가지 전체 주택지 중 82.5%가 법정도로(폭4m)에 못 미치는 폭 2~3m의 골목길로 형성돼 화재 발생시 소방차 진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평균인구밀도 역시 ha당 802명으로 수원(291명),부천(400명)등 인근 대도시와 비교가 안된다. 일부 재개발예정지의 경우 최고 1천400명에 달해 말 그대로 '땅 반, 사람 반'이다.
실제로 지난해 실시된 사회통계 조사에서 수정·중원구 주민의 66%이상이 거주지의 치안·방범이 불안하다고 답해 분당(38%)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고, 화재 위험 역시 43%가 불안하다고 응답, 분당의 16.5%에 비해 무려 3배 가까이 많았다.
■ 살 길은 도시재생, 문제는 고도제한
생활고와 함께 화재·범죄의 위험앞에 방치된 수정·중원구 서민들이 '사람처럼 살 수 있다'며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 바로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도시재생 사업. 그러나 이 역시 허망한 일장춘몽이 될 처지에 놓여있다. 지난 1972년 서울공항이 이전된 이후 40년 가까이 수정·중원구 일대를 옭아매고 있는 고도제한 규제 때문이다. 여의도면적의 28배, 성남 전체면적의 58.6%인 83.1㎢가 고도제한으로 건물높이 45m를 넘지 못한다. 전체 37만4천여가구 중 56.3%인 21만여 가구가 이 족쇄에 묶여 있다.
이로 인해 현재 성남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도 지지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고도제한 규제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건설사들이 참여를 꺼리고 서민주택 건설의 보루인 주공조차 '울며 겨자먹기식'사업에 고충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
해당 주민들의 사정은 더욱 딱하다. 남을 게 없는 사업으로 인해 분양가가 높아지다 보니 기존 주택을 보상받더라도 1억5천만원 이상을 보태야 입주가 가능하다. 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할 주민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이 따로 없다. 실제로 지난 1월 중동3주택 재개발지역 주민들은 1억8천만원에 달하는 주민부담비를 감당치 못해 결국 사업 중도포기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 성남시민? 성난 시민!
정부의 제2롯데월드 건립 허용 방침이 발표된 직후 시민들은 '이제야 40년 숙원이 풀리게 됐다'고 반색했다. 500m가 넘는 초고층 건물을 허용하면서 고작 영장산(193m)높이까지만 규제를 풀어달라는 성남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을까, 롯데월드 건립허용과 함께 부각됐던 고도제한 문제는 어느새 세인의 관심권 밖으로 내밀리는 분위기다.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던 국방부와 공군도 이렇다할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제나 저제나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던 주민들은 급기야 23일 대규모 궐기대회까지 열기에 이르렀다. 행사가 열린 탄천 둔치에는 경찰추산으로만 1만7천여명의 시민들이 구름같이 몰려 성난 민심을 표출했다. 이대엽 시장은 "제2롯데월드가 1조7천억원의 투자증대 효과, 2만3천명의 일자리 창출효과를 거둔다면 성남 구시가지의 도시재생사업은 투자증대 5조2천억원, 일자리 창출만 8만8천에 달한다"며 "성남시민들의 주장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답게만 살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