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을 맡은 최수지(고교 2년) 양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최 양의 지시가 수화를 통해 떨어지자 이연옥(고교 3년) 양은 엄마를 위해 산 머리핀을 안방 화장대에 올려놓고 나왔다. 이어서 밤 늦게 퇴근한 엄마 역할의 오보배(고교 3년) 양은 머리핀을 보고 감동해, 곤히 자고 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인천성동학교 도서부원 청각장애 학생들이 지난해 12월, 소리없는 영화 '아르바이트'의 마지막 장면을 찍었다.
2008년 2학기 주안영상미디어센터(이하 미디어센터)의 '찾아가는 미디어교육' 과정을 밟으면서 영화를 제작한 청각장애 여고생들은 영화 촬영에 대한 지식, 각종 장비와 편집에 필요한 컴퓨터 등도 센터 측의 도움을 받았다. 더해서 이들은 직접 각본을 쓰고 연기와 촬영, 연출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경인일보 4월 6일자 23면 보도> 청각장애 여고생이 어머니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용인 이 영화는 지난 3일부터 사흘간 한국독립영화전용관에서 열린 제7회 서울 장애인 인권 영화제 상영작에 선정돼 관객들과 만났다.
'아르바이트'와 함께 성동학교 학생들의 '들을 수 없는 문',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의 지적장애인 김순미(32·여)씨가 제작한 '작은 새의 날개짓'이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중증장애인의 주거문제를 다룬 '작은 새의 날개짓'은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세 영화의 공통분모는 장애인의 삶을 장애인의 시선으로 솔직담백하게 담아낸 데 있다. 이와 함께 영화 제작자들은 미디어센터의 '찾아가는 미디어교육' 과정을 밟았다.
성동학교 학생들은 지난해 하반기, 김순미씨는 지난해 상반기 4개월여 동안 미디어센터의 미디어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 말 보다 쉬운 영상언어
청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시각이미지를 통한 소통을 전제하지 않으면 소통 자체가 어렵다. 이러한 현실은 시각이미지를 중심으로 이뤄진 영상미디어에 대한 교육이 절실함을 상기시킨다.
미디어센터의 '찾아가는 미디어교육'은 센터에 자발적으로 찾아와 교육을 들을 수 없는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미디어 소외계층을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이 프로그램은 참여자들이 영상미디어를 일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둔다. 때문에 단발성 교육은 지양하고 장기적 교육을 통해 참여자들끼리 혹은 참여자와 미디어센터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식으로 유도한다.
| ||
▲ 노인들을 위한 실버미디어교육 |
손동혁 미디어센터 소장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는 말과 글, 몸 동작 등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영상표현은 협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미디어 소외계층에 교육적 요소가 다분하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괴리된 삶을 살고 있는 미디어 소외계층이 영상 표현 작업을 통해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센터 관계자들은 '찾아가는 미디어교육'을 기획하는 데 중요한 부분은 지역에서 미디어교육 대상자를 찾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현재까지 진행됐거나 진행중인 교육대상은 이주여성, 여성노동자, 장애인, 야학생, 노인 등이다.
| ||
▲ 민들레야학 장애성인 미디어교육 |
장기적인 관점에서 각 대상을 주시하되, 교육이 가능한 여건에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 범위를 좁혀 우선 교육을 실시하고, 이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영상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 교육이 그룹 내부에서 재생산되는 효과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일례로 이주여성교육의 경우, 2008년에 1차 교육 후 올해 2차 교육이 준비중이다. 1차 교육 때 통역을 붙이기 어려운 여건상 비교적 한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한 대상자들을 모집했다. 교육 이후 수강생모임인 '무지개 파워'가 만들어졌다. 이 모임도 올해 진행될 교육에 참여할 예정이다. 모임 구성원들이 새롭게 모집한 대상자들의 교육활동을 보조하고, 통역 또한 자처한 것이다.
| ||
▲ 영화 편집작업중인 지적장애인 김순미씨. |
'찾아가는 미디어교육'의 이같은 과정은 궁극적으로 미디어를 이용해 사회에서 잘 들리지 않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있다.
손 소장은 "미디어교육은 다양한 영역의 통합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말로 표현할 때 어려운 내용이지만, 영상언어를 통해 보다 쉽게 이야기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며 "지역주민들이 영상을 통해 만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지역에서 영상으로 소통하는 것이 익숙한 일이 되는 것, 소규모 영상모임들을 통해 지역 영상 활동이 활성화되어 지역 구성원들의 소통이 쌍방향으로 활발해지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고 말했다.
※ 인터뷰 / 주안영상미디어센터 미디어교육팀 경희령 교사
"즐거운 자기표현 과정 중점… 누구나 영상시대 주역으로"
"교육을 통해 시민들의 작품이 생산되는 것보다 과정을 경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안영상미디어센터 미디어교육팀 경희령(27) 교사는 "교육참여자가 영상미디어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즐겁게 자기 표현의 경험을 갖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영회를 통해 영상으로 소통하는 경험을 갖는 것도 이같은 경험의 일부"라고 덧붙였다.
| ||
▲ 경희령 주안영상미디어센터 미디어교육팀 교사(사진 왼쪽). |
경 교사는 "영상제작과정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직접 작품활동에 적용해 보는 실습과정을 거치면,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멋진 영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아냈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과거 소수 전문가에 의해 생산되던 영상미디어가 이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대로 변했다.
경 교사는 "현재 영상미디어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민주적 소통의 매개가 됐다. 일반 시민이 미디어 생산자가 되어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라며 "미디어교육은 누구나가 영상으로 의사표현이 가능케 하는 소통의 권리를 지키는 일종의 파수꾼과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경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