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희 (숭실대 교수·문학평론가)
여성 시인 문정희는 시 '다시 남자를 위하여'에서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검은 눈썹을 태우는/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멸종 위기네"라고 이 시대의 왜소해진 남성성을 진단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성이 문제화되었던 것은 그간 억압되었던 여성성을 문제 삼으면서였다. 사회적 관습과 제도 속에서 여성의 성(gender) 정체성을 고착시켰던 것은 여성 자신이 아니라 가부장적 위계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위계질서 속에 편성되었던 삶의 구조의 영향은 여성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장남을 포함한 남성에게도 해당되었던 사안이다. 이미 잘 알고 있듯이 가부장적 위계질서는 남성 혈통을 중심으로 편성된 가족이데올로기의 반영체이다. 이는 가족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차등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근대적 삶 속에서 이와 같은 토대가 남성에게 언제나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가부장적 위계는 여성에게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마치 숙명처럼 억압을 행사해 온 것이 아닐까? 한 남성이 나에게 "태어나보니 나는 장남이었고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내 삶은 그 안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억압된 여성성이 거론될 때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가정과 자식을 위해 나도 뼈 빠지게 일해 왔다'는 남성들의 억울한 발언이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사회에 돌입하면서 한 가정의 가장은 사회적 임금 노동자로서 위치하게 되며 가족은 가장의 임금에 의존하는 방식을 취한다. 아버지의 권위가 가문의 계승 따위보다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 유동적으로 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즉 산업화의 구조가 부권의 권위와 경제력을 동일시함으로써 남성들을 경제적 노예로 전락시킨 것이다.

예전과 달리 가부장적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에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여전히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며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거기에 여성의 삶도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남성중심주의를 옹호하려는 발언이 아니다. 남성 또한 가부장적 관습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 극명한 예로 요즘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곤 하는 '기러기 아빠'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장기간 외국에서 체류해야 하는 가족들을 위해 자식의 유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아버지들은 이중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우선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장기간 가족에게 모두 헌납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런 가운데 갖게 되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 같은 희생에는 자식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과 정신적 보람이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 스스로 자청한 일일지라도 결코 다 옹호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한 사람의 희생을 담보로 얻게 되는 가족의 보람과 가치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행복과 부(富)만이 아니라 희생 또한 모두 골고루 분배될 필요와 당위가 있다. 그것이 건강한 가족이며 사회이다.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아버지들의 도구화된 삶이 여성 억압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도구화된 가장이 이끄는 가족의 이면에는 언제나 정서적 황폐함이 은폐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희생과 소외감을 장기간 감내해야 하는 기러기 아빠들이 과연 그들의 미래에 건강성을 유지한 채 가족에게로 복귀할 수 있을까? 한 존재를 도구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구조조정이 계속 진행되면서 직장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투쟁이 더욱 더 극단화되고 있는 요즘이다. '도구화된 남성성'이라는 제목 하에 글을 쓰면서 또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 '왜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온통 희생자만 있는가?'라는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