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는 다시 그를 생각하는 기획시리즈를 마련,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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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1898~1959)은 인천 특유의 토양이 빚어낸 인물이다. 기개가 강한 사람을 많이 배출한 땅, 강화에서 나고 성장했으며, 서양문물이 넘나들던 '국제도시' 개항장에서 사회에 눈을 떴다.
죽산 스스로 말하듯 그는 인천에서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죽산은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쓴 '내가 걸어온 길'이란 글에서 "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다"고 했다. 이 일로 1년 옥살이를 했음도 밝혔다. 1개월을 쉬지 않고 섬 전역에서 펼친 강화의 3·1운동은 전국 3·1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때 20대 초반의 젊은 조봉암은 나중에 '죽산 조봉암'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죽산이 얼마나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였는가는 '인천 1호 의학박사' 신태범의 얘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태범 박사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신 박사가 처음 죽산을 만난 게 1945년 10월이다. 신 박사의 병원인 '신 외과'에서다. 열 손가락 중 여섯 개가 상해 치료차 죽산이 병원을 찾은 것이다. 그 당시 인천에서는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 때문에 죽산의 손가락이 많이 상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2개월이 지났는데도 손가락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만큼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다. 이때 맺은 신 박사와의 인연은 잠시나마 정치노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46년 죽산은 좌익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인천지부 의장으로, 신 박사는 부의장으로 각각 선출된 것이다. 그런데 한 달 뒤 이들 2명은 모두 사표를 내던진다.
인천에서 미곡 분야의 직업을 갖고 있던 죽산은 1948년과 1950년 인천에서 내리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다.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이승만 정권과의 목숨을 건 정치적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원은 "죽산이야말로 인천에서 나고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면서 "근대 한국의 틀을 다진 인물, 죽산은 인천만이 갖고 있는 토양이 있었기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