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쌀이 가까이 있어도 배불리 먹지 못했던 시절이다. 쌀 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해 항상 쌀이 부족했다. 만나면 으레 아침 인사가 '식사는 하셨습니까'였다. 이런 배고픔을 잊게 해준 것이 바로 '통일벼'의 탄생이다. 통일벼는 우리나라 식량자급을 가능하게 했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국가연구개발 반세기 10대 성과' 가운데 녹색혁명의 주역으로 통일벼를 선정하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 통일벼를 개발한 과학자가 바로 허문회(83) 전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로, 현재 수원 백성병원 중환자실에서 투병중이어서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허 전 교수가 통일벼를 개발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지금은 잊혀져가지만 우리에게 허 전 교수는 보릿고개에서 해방시켜준 독립투사와도 같은 존재다.
■통일벼의 정책적 지원=우리나라는 60년대까지만해도 고질적인 식량난을 겪고있던 식량부족 국가였다. 당시 정부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대체작물도 심어보고, 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벼를 만들어 보게도 하고.
정부의 이런저런 노력에도 좀처럼 굶주림은 가시지 않았다.
71년 우리 기술로 '통일벼'를 개발하고나서야 그나마 굶주린 배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통일벼가 우리나라를 식량부족 국가에서 식량자급국가로 탈바꿈시키면서 '기적의 볍씨'로 불렸다.
처음부터 통일벼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다. 허 전 교수가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했을 당시, 일본·대만산 볍씨를 교배한 1대 잡종을 아버지로, 필리핀에서 육종한 볍씨를 어머니로 삼아 키가 작아 잘 쓰러지지 않고 병충해에 강한 통일벼의 모종(IR667)을 탄생시켰다. 허 교수가 귀국했을 때만 해도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더욱이 다수확이 가능한 벼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
통일벼는 그 생산량이 일반벼 품종보다 40% 가까이 많았다. 재래종 벼는 키가 커서 잘 쓰러지고 온갖 병해충에 약해서 수확량이 지금의 30%에도 못 미쳤다. 농진청은 이 사실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허 전 교수의 연구가 성공한다면 최대 숙원이었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컸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희농 1호'의 보급에 주력하고 있어 농진청으로서는 새로운 벼를 소개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희농은 64년 정부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종자로, 보급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희농이라는 이름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글자를 본 떠 만들어진 것만봐도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농진청은 바로 이 희농의 보급 책임을 맡았고, 이 때문에 IR667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강력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희농은 우리나라 풍토에서 잘 자라지 못해 실패했고, 그 실패가 공식화되고 나서야 새로운 대안으로 IR667이 제안돼 국가의 지원속에서 연구가 시작됐다.
■녹색혁명을 가져온 통일벼=통일벼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있다. 통일벼에 대한 계통선발이 있은 후 70년부터 시험재배가 이뤄졌다. 이듬해 출하한 쌀을 가지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정계·재계 인사들이 시식해 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 시식이 있기 몇 달 전에 이미 통일벼의 보급은 결정됐지만 밥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보급에 회의적인 의견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날 시식이 있은 후 통일벼의 전국적인 대량 보급이 결정됐다. 시식을 끝낸 후 무기명 평가에 나섰는데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검정표를 가장 먼저 제출하면서 '밥맛이 좋다'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참석한 시식자 누구도 그 자리에서 밥맛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농진청은 통일벼를 개량한 신품종을 개발 보급해 80년대와 90년대 풍작을 이뤄 식량자급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이는 그동안 축적된 농업분야의 연구성과와 국가 차원의 강력한 증산시책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지금도 통일벼가 지니고 있는 혁신적인 기술은 우리나라 고유의 벼육종 기술 방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통일벼의 개발은 보릿고개를 넘어 식량의 자급자족을 달성해 우리나라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통일벼는 1992년 정부가 수매를 중단하면서 농촌에서 사라졌다. 밥맛이 떨어지는 통일벼의 단점을 보강하면서 수확량도 많은 품종이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허문회와 벼, 그리고 쌀=1960년대 우리나라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 국가적인 숙원사업은 '식량의 자급자족' 달성이었다. 쌀 부족문제 때문에 도시락을 일일이 검사해 쌀밥을 싸온 아이들은 선생님한테 혼쭐나기 일쑤였다. 이런 역사를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던데는 '녹색혁명'으로 불린 통일벼 개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도 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통일벼의 개발은 단순한 육종의 문제가 아니라 치열한 연구의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벼는 크게 자포니카 품종과 인디카 품종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먹는 일반적인 쌀은 모두 자포니카이고, 태국이나 인도에서 먹는 쌀이 인디카이다. 이 두가지 특징을 가지는 잡종 쌀을 개발하기 위해서 일본 학자들이 오랜기간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을 정도다.
허 전 교수가 이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다. 관련 서적을 읽고 또 읽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급기야 통일벼를 만들어 낸 것이다.
허 전 교수는 이어 통일품종을 이용해 내충성벼 계통 육종도 실시했다. 좁은 국토 때문에 만들어진 간척지에서 재배하기 위해 내염성이 강한 벼를 계통육종하기도 했다.
특히 내염성 계통 HP3319는 90년 개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내염성이 강한 종으로 인정받아 국제미작연구소에서는 내염성 모본으로 사용할 것을 세계 각국에 권장하기도 했다.
※ 허문회 서울대 교수는… "교잡육종기술 연구… 대한민국 농학계 선구자"
교수로 활동한지 몇 년이 지나지않아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초청을 받아 당시 최신의 벼 육종 기술을 배울 기회가 주어졌다. 이때 알게 된 기술을 가지고 기존의 재래종 벼보다 많은 볍씨를 가진 통일벼 모종을 개발해낸 것이다. 허 전 교수는 통일벼 개발 당시 겨울철에는 통일벼 품종을 따뜻한 필리핀으로 보내 재배하고, 봄에 모심기 직전 비행기로 다시 공수해와 논에 뿌렸을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이후 허 전 교수는 2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한국육종학회장(83~85년), 한국작물학회장(85~87년) 등을 지내면서 우리나라 농학계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또 서울대 농대 교수로 30년 이상 재직하면서 벼 연구와 후학 양성에도 앞장서 우리나라 농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허 전 교수는 교잡육종의 기술을 통해 통일품종만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품종들의 개발을 주도하면서 우리나라 벼 발달을 주도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국제적인 벼학자로도 널리 인정받았다. 통일형 벼 품종을 지배하는 유전자 SD-1 작용과 위치를 규명했고, 외국에서 벼 개체별 유전자 위치를 알아보는 기준인 표지유전자 기주를 연구, 육종된 벼들의 표지형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서울대 농대 정년퇴임 이후에도 허 전 교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벼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이용, 벼 재배의 전파경로를 추적하는 연구를 했다. 고고학자들에게도 도움을 주어 우리나라 벼농사의 시작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3천년 전보다 훨씬 이른 5천년 전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허 전 교수의 벼에 대한 유전연구와 열정 덕분에 우리나라 벼 연구 수준은 한층 더 높아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