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희 (숭실대 교수·문학평론가)
[경인일보=]인간의 거주 공간 가운데 가장 신성한 곳은 서재나 침실이 아니라 부엌이다. 부엌은 기원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말했던 물질의 기본 원소가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로 결합하는 연금술의 공간이다. 음식의 다양한 재료들은 물, 불, 공기와 더불어 반죽되고 끓여지고 발효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형태와 맛으로 재탄생된다. 흙에서 자란 것과 물에서 자란 것이 서로 만나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 단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기묘한 맛으로 변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순식간에 조화를 이루는 부엌은 인간이 거주하는 곳 가운데 가장 독특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이질적인 재료들을 서로 합쳐 조화로운 음식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부엌에 들어선 사람은 풍부한 상상력과 감각과 정성을 가지고 재료를 다루어야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특히 정성이 많이 들어간 음식일수록 그 맛이 깊다. 어머니의 손맛이 맛 중의 맛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정성 때문이다. 거기에는 음식을 나누어 먹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부엌은 가족의 몸과 마음을 지켜내는 약제실이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은 아마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눌 때일 것이다. 음식을 나누는 순간에는 즐거움과 휴식과 정감이 함께 있다. 싸움을 한 사람들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아니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수저를 놀리는 손길이 어색해지고 마주한 얼굴을 보는 것이 곤혹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천하의 산해진미도 모래를 씹는 듯 변질되고 만다. 관계가 어그러지면 밥상도 치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식은 관계의 회로를 돈독히 하는 매개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맛의 쾌락을 함께 나누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요리를 하는 사람은 요리 하기 전에 누구와 이것을 먹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감안하면서 요리에 넣을 것과 뺄 것을 정한다. 그 마음이 훌륭한 밥상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부엌이 점점 썰렁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간혹 하게 된다. 바쁜 생활을 감당하다보니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음식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번거롭고 피로한 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각자 흩어져 매끼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다 잠든다. 아이들은 급식을 먹거나 배달된 도시락을 집에서 혼자 먹기도 한다. 노인들은 하루 종일 맛없는 끼니를 쓸쓸하게 챙긴다.

이 틈을 비집고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은 외식문화를 앞 다투어 선도한다. 팔도 맛집과 먹거리 장터, 현란한 장식의 레스토랑들, 이색적인 국적 불명의 퓨전음식들, 향토성으로 포장된 맛의 향연들, 이곳저곳의 원조집과 야식집. 사람들은 인터넷을 뒤져 이곳을 좇는다. 번호표를 들고 기어이 먹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음식점 앞에서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단란하고 정감 있는 식탁은 사라지고 어수선하고 분망한 그리고 낯설고도 과잉된 식탁이 우리의 생활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탁 앞에서 우리의 대화는 인생살이와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의 맛 자체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시장의 원리가 도입된 비인간적인 세태를 매스컴이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부엌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생명을 보존해주는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는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수고와 정성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아니 오히려 부엌일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폄하해온 것이 사실이다. 온기가 사라진 부엌을 떠올려 보자. 이는 사람 사는 냄새의 근본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끈끈한 관계가 희미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쌀 씻는 소리, 찌개 끓는 소리가 가득했던 부엌이 사라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