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절초풍까지는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라온'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왜 영어 알파벳으로 적어 놓았는지, 왜 우리나라 사람도 못 알아보고 외국인도 못 알아보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그 조카의 주장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우리 한글로 적자는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다음날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정말로 '라온'이 '즐기다'라는 뜻인가요? 제 딸 이름이 '나온'인데,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순 한국말이지요. '즐거운, 기쁜'이란 뜻이 있습니다. '라온'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네요. 답변을 기다릴게요.
'우리말 편지' 애독자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라온'이란 말은 틀리고 '나온'이 맞는 말인가? 사전에서 '나온'을 찾아보았습니다. 옛말 '납다'의 활용형이고, 뜻은 '즐거운'이었습니다. '납다'를 찾아보니 형용사로 '즐겁다'는 말이었습니다. "엇디 납디 아니료"라는 예문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온'도 있었습니다. 역시 옛말로 '즐거운'이라는 풀이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라온과 나온 둘 다 맞는 말이고, '비어라온'은 '즐거운 맥주' 아니면 '맥주를 즐기자' 정도가 되겠지요.
뜬금없이 'beerlaon'이란 표기로 인해 제법 긴 얘기가 돼버렸습니다만, 요즘 한글보다 영어 알파벳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수년 전 대학의 어느 영어 강사께서 1980년대 혜화동 로터리에 'yield'란 교통 표지판이 있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도 그런 걸 본 듯했습니다. 문제는 그 표지판을 꼭 봐야 할 대한민국의 운전자들이 무슨 뜻인지 과연 알까 의문이었다는 거였습니다. 하긴 저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저기 저 용산 미군기지에나 서있을 법한 표지판을 그대로 끌고 나온 셈이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혜화동 로터리에 'yield'는 사라졌지만 더 많은 영어 표기가 거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비상구보다 'exit'가, 멈춤보다 'stop'이 더 많습니다. 주차장이란 표지보다 P가 더 많고 출구와 입구보다 'in'과 'out'이 더 많습니다. 간혹 'in'으로 나오고 'out'으로 들어가는 차도 있습니다. 안내보다 'information'이 더 많습니다. 서울 인사동에는 'starbucks'도 '스타벅스'란 한글 간판을 달았습니다. 인사동의 자존심입니다. 'crown bakery'도 인사동에서는 '크라운 베이커리'입니다. 그런데 인사동 초입에 있는 안내소는 'informatoin'과 '觀光案內所'란 글자밖에 없습니다. 관에서 하는 일이 이렇습니다.
일상생활에 매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공공표지가 이 모양이니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만, 대한민국에는 '화장실'조차 없습니다. 잘 찾아보면 있지만 대개 'toilet'이거나 'restroom'입니다. 냉수와 온수를 'ice'와 'hot'이라고 표기하고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색깔 구분조차 하지 않아 재수 없으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물은 스스로'보다 '물은 self'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헌혈 캠페인에도 'blood donor'가 등장해 영어 모르면 헌혈도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아, 영어와 영어 알파벳의 범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happy Suwon'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말로 행복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