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진현 (인천민예총정책위원장)
[경인일보=]'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종이를 맞들다니 잘못하면 찢어지지 않을까. 어려서 본 어떤 코미디에서는 백지장을 맞들다가 찢어먹고는 '백지장은 맞들면 찢어진다!'로 패러디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백지장을 맞들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옛 속담은 일상 생활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분명히 백지장을 맞들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런 속담이 생겨났던 것이다.

필자가 자란 집은 유리창도 몇 있었지만 방문과 샛문과 곁창문 등은 창호지를 바른 문이었다. 여름 지나 찬바람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면 볕 좋은 휴일에 문들을 모두 떼어 창호지를 새로 바르곤 했다. 문창호 새로 하는 날은 잔칫날이라도 되는 듯, 온 식구들이 모여서 북적댔다. 방문이며 창문을 모두 떼어 안마당에 내놓은 뒤, 물을 끼얹고 솔로 문질러 가며 박박 닦아낸다. 웬만한 종이들은 북북 뜯어내면 되지만 문살에 달라붙은 종이들을 말끔히 떼어내지 않으면 새로 종이를 붙였을 때 얼룩이 지고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종이를 북북 뜯어내는 일은 어린 사람들이 신나서 해치우는 일이었다. 이날만은 문에 구멍을 내도 꾸중도 안 들으니 뽕뽕 소리내며 구멍을 낸 다음 손을 넣어 종이를 잡고 주욱 찢어내는 맛도 경쾌하였다. 그러나 문살에 달라붙은 종이를 긁어내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요즘처럼 솔의 품질이 좋기나 했던가, 모지라진 수세미, 칫솔까지 동원하여 문살을 깨끗이 닦는다. 그리고 한쪽에 세워 잠깐 말리면서 마당을 아주 깨끗이 치우고 물기도 말린다. 새로 풀칠하는 종이가 젖거나 더러워지면 안되니까.

잠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면서 마당과 문살을 말리고 나면 새로 창호지를 바를 차례이다. 우선 신문지 따위를 바닥에 넓게 펴고 그 위에 창호지를 펼친다. 멍울이 없도록 깔끔하게 쑨 풀을 고르게 창호지 전체에 펴 바른다. 풀에 젖은 종이를 들어 문살에 붙이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도 해보려고 문살에 풀을 먼저 칠하고 종이를 붙여봤는데 실패했고 어른들에게 꾸중만 들었다. 문살 옆으로 풀이 비어져 나와서 얼룩이 생기고 그 부분만 종이가 더 약해지는데다 풀이 마르면 종이가 문살에서 떨어져버렸다.

결국 창호지를 문살에 붙이는 데는 예외가 없었다. 창호지 전체에 풀을 바르고 그렇게 풀바른 창호지를 조심조심 맞들어서 문짝에 잘 붙인 후, 살살 두들기듯 문질러 문살에 붙인다. 이때 창호지는 혼자서는 들 수 없다. 혼자 들면 풀 묻은 종이가 저희끼리 붙기 쉽고 이렇게 붙은 종이를 섣불리 떼려다가는 자칫 찢어지기 때문이다. 반드시 맞들어야만 온전하게 문틀에 어그러지지 않게 예쁘고 깔끔하게 붙일 수 있다. 이렇게 새로 바른 문은 안마당 여기저기 그늘에 세워 다시 말린다. 풀에 젖어 위태롭게 늘어져 있던 종이가 말라갈수록 더 하얗게 팽팽해지는 것은 정말 근사한 일이었다. 어쩌면 풀에 한번 젖었다간 마르면서 더 튼튼해지는지도 모른다. 밤이 되어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도 희미하게 풀냄새 나는 문창호는 하얗게 빛나며 환하였다. 그런 날은 어쩐지 집도 새집이요 방도 새방 같아서 뿌듯한 마음에 잠조차 설치곤 하였다.

어쨌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속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고 과학임을 깨닫게 된다. 아니 이쯤 되면 '맞들면 낫다'가 아니고 '맞들어야만 한다'고 바꾸어야 할 판이다. 옛사람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입추가 지났다고 새벽이면 폭염도 사뭇 누그러지고 제법 선선한 바람도 분다. 새벽 한기에 창문을 닫다가 어려서 이맘 때면 문창호 새로 바르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옛기억이 명랑하고 즐겁기보다는 마치 해묵어 구멍 숭숭 뚫린 문짝을 앞에 두고 난처하게 서 있는 기분이 앞서고 말았다. 창호지에 구멍났다고 문짝째 버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흥부네 같은 고단한 살림에 온 식구 모여 놀이하듯 문창호 새로 바를 날을 잡을 수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 어떤 백지장을 들고 있는가. 함께 들 수밖에 없는 그 백지장을 누구와 맞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