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대통령 발언 이후 일부 단체장들이 일방적으로 상대 지역과의 통합을 제안하거나 민의를 묻지도 않은 상태에서 합의발표를 하는 등 지방자치단체가 혼돈과 갈등에 빠져들고 있다. 앞으로도 지방자치단체간의 이해득실이나 정치적 입장, 주도권 선점 등을 염두에 둔 아니면 말고식 제안 또는 논의가 외형상으로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행정체제 개편 특히, 행정구역 개편 문제는 정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은 물론 폐지가 거론되는 광역자치단체의 입장이 각기 다르다. 각 지역에서 '토착 권력'의 기득권을 누려온 공무원, 지방의회, 관변단체는 물론 일부 시민단체들까지도 기반 상실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입장이 제각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랜 세월을 중앙정부는 도시화된 지역의 분리 승격 등 '자리만들기' 의혹을 받아온 시군분할 방식의 행정구역 개편을 주도해 오다가 갑자기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따라서 주무부처는 먼저 행정체제 개편 문제에서 보여 온 철학부재를 겸허히 반성하고 정책의 원칙과 방향성을 확고히 정립해야 한다. 더구나 지방선거를 채 1년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이를 성급하게 추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그 후유증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시군통합과 행정체제 개편 문제는 그동안 개발 불균형, 재정자립도, 효율적인 토지이용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가피성이 제기돼 왔으나 국민적 공감대 형성 노력을 도외시한 채 논의만 무성했었다. 더구나 최근에 정부는 물론 일부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가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보고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어 지역간 지역내 갈등 증폭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시군통합은 정략적 합의나 하향식 추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민투표 등 절차를 거쳐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시군통합과 행정체제 개편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규모의 경제를 통한 지역경쟁력을 강화하고 행정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확보하는 등 여러 가지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기대를 전제로 할 때만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
지방행정체제 개편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방의 균형발전과 국가 경쟁력 제고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질적 지방분권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지방분권이 전제 또는 선행되지 않은 채 지방행정체제 개편을 성급히 추진하는 것은 신중앙집권화의 시도라는 비판과 행정체제 개편 필요성에 대한 대국민 설득력 부재라는 약점을 피해가기 어렵다. 지방자치 선진국들도 국가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지방행정제도 개편을 추진해 왔으나 지금까지는 개혁의 상당 부분이 답보 상태에 빠지거나 폐기되는 등 그 성과는 제한적이라는 평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지방행정체제 개편은 먼저 그 당위성 확보와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부는 지방행정체제 개편안 마련과 함께 획기적인 지방분권을 실행하기 위한 사무권한의 배분, 지방재정제도, 통·폐합대상 기구와 인력의 처리 대책 등 가능한 모든 방안을 동시에 제시하고 마련해야 한다. 통합이 거론되는 대상 지역들도 관 주도보다는 시민이 앞장서서 지역간 합의를 이끌어내는 상향식 접근법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합을 주도하는 지역은 교만함을 버리고 기득권의 포기와 양보, 상대지역에 대한 배려 등 첫 단추부터 잘 끼워야 한다. 1998년 3여(여수시-여천시-여수군)통합은 주민발의에 의한 상향식 통합의 좋은 본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