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은 무상히 흘러 벌써 백로(白露) 절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아침에 미술관 마당에 들어서면 풀밭이 이슬에 함초롬히 젖은 것을 봅니다. 산자락의 풀벌레 소리 또한 나날이 짙어져 머지 않아 만산에 단풍이 다가들 것임을 예감케 합니다.
지난 오월에 '김이환 관장님에게' 라는 편지를 주셨습니다. 그 고마운 편지를 받고 답장이 너무 늦었지요? 올해는 유난스레 벼락과 번개가 자주 몰아치고 무더위도 때없이 기승을 부려서 차분히 편지를 써서 보낼 만한 여유를 못 가졌습니다. 미술관 하나 유지하고 사는 것이 쉽지가 않은 거지요.
어디 저만 그랬겠습니까? 전직 두 대통령의 국민장과 국장을 연거푸 치르시느라 의장님께서도 황망한 시절을 보내셨을 줄 압니다. 사실 제 답장 같은 것 개의하실 만한 틈이 없으셨을 테지요.
아무튼 뒤늦게 보내는 이 답장의 줄기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김형오 의장님! 고맙습니다. 미술관을 찾아주셔서…." 그리고 앞으로 다른 사립 박물관미술관장들에게도 저처럼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의장님은 2008년 가을, 정기국회 국정감사 기간중 수원 화성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길에 용인 흥덕지구에 있는 저희 이영미술관에 들르셨습니다. 오랜 관행이던 국회의장 해외 순방을 마다하고 민생체험을 위해 열이틀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마흔두 곳을 들르는 '우리땅 생생 탐방'을 하셨지요. 그 중 한 곳이 저희 미술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장님은 그 마흔두 곳을 그저 가볍게 들러 본 것이 아니라 그 한 군데, 한 군데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길 위에서 띄우는 희망 편지'를 쓰고 이를 묶어 한권의 책으로 펴내셨습니다. 그 편지에는 방문 소감과 함께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제게 주신 '희망 편지'에는 이영미술관 소장 작품인 박생광, 전혁림 화백의 그림에 대한 전문가 수준의 촌평과 함께 힘든 일을 잘해내고 있다고 칭찬하며 다시 만나자고 기약하셨습니다. 저는 이 '기약'에 '고맙습니다'라고 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장님!
우리나라에도 이제 사립미술관이 100개를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박물관까지 합치면 국·공립의 몇배에 이릅니다. 각각 제나름의 뜻이 있어 개인이 사재를 털어 만들고 유지하는 이 미술관, 박물관들이 전국에 고루 자리잡아 지역의 문화·예술발전에 보이지 않게 큰 몫을 해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의장님이 '지금 모습 그대로 100세 특별전에서 다시 만나기를…'이라는 희망 메시지를 보냈던 전혁림 화백의 작품들이 전시된 통영의 전혁림 미술관도 그 사립 미술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사립 미술관, 박물관들의 운영 사정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경제적 풍요로움을 디딤돌로 문화의 시대를 맞았다고 할 수 있건만 개인의 선의에 기초한 이런 문화시설들의 운영을 지원하는 시스템은 아직도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아니, 그에 앞서 사회 각계각층의 애정과 관심이 더욱 절실한 시점입니다.
이러한 때에 입법부의 수장이신 국회의장이 사립미술관을 찾아 주셨으니 고마울 수 밖에 없지요. 애정 어린 관심이 있을 때 비로소 어려움을 이해하게 되며,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만 옳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김형오 의장님!
올해도 해외 순방 않으시고 지난해처럼 전국 순례를 하실 계획이신지요? 꼭 그런 '순례'가 아니더라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립 박물관, 미술관을 자주 들러주십시오. 저는 의장님이 '다시 만나자'고 기약하신 그 '만남'이 전국의 박물관, 미술관에서 자주자주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저 같은 미술관, 박물관인들이 참으로 고마워하고 힘을 얻을 것입니다.
'길위에서 띄운 희망 편지'의 수익금을 좋은 곳에 쓰기 위한 모임이 있다면서요? 저도 그 모임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기약'합니다. 지난번 출판기념회를 의례적인 일일 거라고 예단하고 가지 않은 미안함을 이 참에 덜어 볼까 합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념하시고,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