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져 보면 더도 덜도 필요없다는 것은 완벽을 의미한다. 선인들은 한가위를 더도 덜도 필요없는 날이라 일컬었다.
추석을 가리키는 옛말이 '가배'이고 가배는 가운데라는 의미였으며 '한'은 크거나 중심인 것을 의미하는 말이니 한가위란 일년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날, 가장 완벽한 날이라 할 수 있을까? 한가위가 완벽한 날이라면 한가위를 쇠는 사람들의 심정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날이 완벽하다고 사람까지 완벽한 기분이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오히려 그렇게 풍성하고 완벽한 명절이기에 부족한 것이 더 도드라지고 더 서러운 것은 아닐까? 명절이야 음식이 주장이고 음식은 여성의 몫이었기로 최근 들어서는 명절 증후군같은 우울한 증세마저 없지 않지만 여전히 더도 덜도 필요없는 추석을 결코 완벽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이 좋은 시절에 가족과 이웃과 마음껏 지낼 수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 아닐까?
1920년대 가난한 기층 민중의 삶을 섬세한 여성적 시선으로 형상화하며 진지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이 박화성이다. 박화성은 등단작 '추석 전야'에서 '추석'이라는 풍요로운 시간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사라진 척박한 사회를 대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영신은 남편도 없는 홀어미의 몸으로 두 자식과 시어머니를 부양하며 산재를 입은 몸으로 치료는커녕 낮에는 방직회사의 여공으로 폭력과 성적 희롱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가혹한 노동을 감당하고 밤에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위해 밤새 삯바느질을 한다. 집집마다 떡내음, 기름내음, 칼도마 소리가 나는 풍성한 추석 전날밤이지만 영신의 집은 밀린 집세를 내고 나니 달랑 50전짜리 하나가 남아 네 식구 저녁거리조차 여의치 않다.
둥글대로 둥글어 온 누리를 밝게 비추는 열나흘 달빛과 끓일 것 없는 가난한 일가족의 허름한 초막 마당에 떨어진 50전 백통화가 대조를 이루면서 식민지 조선 민중의 고단한 삶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영신이 특히 절망하는 것은 단순히 돈 한 푼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가위를 앞두고 가난한 홀어미의 간곡한 애원에도 한 푼 에누리 없이 집세를 받아가는 집주인 영감의 인색하고 가혹한 처사는 '추석'이라는 완벽한 시간과 대비되면서 인간을 앞서는 물질적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정말 빛나는 것은 영신 일가족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으면서도 금전의 가치, 마당에 내팽개친 50전 동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당에 쓰러진 자신들의 상태를 돌아보고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울음을 멈추는 이들이 지켜낸 것은 삶의 존엄이며 굽힐 수 없는 자존심이었다. 이것은 단지 돈 한 푼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전에 우연찮게 용산에서 식당을 운영하시던 한 아주머니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용산4구역의 재개발 과정에서 알토란처럼 키워온 일터와 함께 하던 분들을 졸지에 영원히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려니와 권리금이다, 인테리어 비용이다 해서 투자한 비용마저 변변히 보상되지 않아 앞날조차 막연한 이 분의 첫 번째 소망 또한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었다. 천국도 부럽지 않게 신나게 일하면서 이웃과 행복하던 일터, 다시 그런 곳에서 일할 수 있기를, 그리고 더 어려운 이웃 더 불우한 주변과 꿈과 행복을 나눌 수 있기를,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곧 추석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았으면…. 무관심과 오해 속에서도 여전히 삶에 대한 열정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시는 용산의 철거민들에게도 그 분이 원하는 더도 덜도 필요없이 힘써 일하며 함께 행복한 날이 가까이 오고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