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한 학자로서, 쓴소리마저 아끼지 않던 고고(孤高)한 학(鶴)과도 같은 존재였다. '깜짝 놀랄 만한 대통령 후보'로서 지난 두 대통령의 은근한 러브콜을 받았지만 야멸차게 거절하고는 학자의 길만을 걸었다. 그래서 그의 주가는 더욱 치솟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결국 비판자를 총리로 택하는 용기(?)있는 결단을 내렸다. 충청권을 비롯한 일부에서는 총리로 그칠 분이 아니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그러나 지난 21일부터 23일 새벽까지 진행된 인사청문회를 통해 정 후보자는 국무총리로서 적격자임을 국민들에게 확신시켜주지 못했다. 자신과 배우자의 소득세 탈루가 확인됐고, 공무원의 영리행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한 것이 드러났다. 병역면제 의혹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없었고, 기업인에게 받은 1천만원의 '용돈'은 사회지도층으로서의 도덕적 불감증을 보여주었다.
급기야 민주당과 선진당 의원들은 정 총리를 소득세법·국가공무원법·공직자 윤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야당이 총리 후보자를 검찰에 고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정 총리 이외에 청문회를 거친 9명의 장관 및 공직후보자들도 김태영 국방장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흠 투성이의 인사들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양심이랄 수 있는 대법관 후보자도 위장전입을 했다. 혹자는 요즘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 몇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위장전입자들 대부분이 '자식을 위해서…'라고 강변한다. 누구는 자식이 없는가? 사람이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법을 어기는 수도 가끔 생길 것이고, 때론 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도 없지 않다. 성인·군자처럼 살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지도층이나 고위공직자들의 범법행위에 계속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된다. 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법대로 처리되는 국민 앞에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인사청문회가 너무 인민재판식 마녀사냥이자, 인권도 온 데 간 데 없다라고…. 물론 역기능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청문회가 도입된 지 9년간 적잖은 결격자가 청문회를 통해 낙마하는 등 그런대로 효과도 없지 않았다. 공직에 몸 담고 있거나 미래의 공직 희망자들에게 평소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훈을 주기도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연적 과정이다. 고위공직 후보자들이 위장전입·세금탈루·논문표절·병역의혹에다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줄줄이 불거져 나온다는 것은 결코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다면 스스로 공직후보 지명을 거부해야 할 일이다. '법치국가'인 줄만 믿고 살아온 힘없고 순진한 대다수 서민들이 분노를 느끼기 때문이다.
어떻든 정운찬 총리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28일 야당이 퇴장한 가운데 통과되기는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9일 정 후보자를 총리로 정식 임명했다. 임명장을 주면서 위로는 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아 씁쓸했을 것 같다. 정 총리는 인사청문회가 끝난 뒤 새벽에 귀가하니 아내와 아들·딸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다른 장관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만큼 고위 공직자의 길은 험난한 것이다. 정 총리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을 때만 해도 상당수 국민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청문회를 거치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변한 게 현실이다. '존경받던 학자로 남을걸…'이라는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국민과 나라만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할 일이다.
취임사에서 말했듯이 정말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내딛는 자세로 몸을 던질 각오를 해야 한다. 만인지상(萬人之上)에 힘겹게 오른 정 총리는 이제 청문회와는 또 다른 국민들의 심판대에 올랐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이번에 임명된 내각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민심은 천심이기에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