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희 (숭실대 교수·문학평론가)
[경인일보=]내가 도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초등학교 운동장이다. 저녁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쯤 되면 나는 종종 그곳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보곤 한다. 꽃밭도 나무도 교실도 다 운동장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그 위로 운동장만한 밤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 텅 빈 공간이 울긋불긋한 꽃밭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공터가 사라진 지 오래다. 도시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원도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꽃밭과 분수, 놀이기구, 별로 감동스럽지 않은 조각상들. 공공의 장소엔 언제나 볼거리를 늘어놓아야 한다는 발상일 것이다. 지난 봄 구청에서 동네에 있는 조그마한 놀이터를 새로 정비한 적이 있다. 이것저것 기구들을 들여놓고 나무도 다시 심어 놓았는데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것을 설치하다보니 정작 아이들이 뛰어다닐 공간은 더 작아져버렸다.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지금은 미끄럼틀 아래 모여 쪼그리고 앉아 논다.

없는 것이 없는 서울. 채우고 교체하고 다시 설치하고 꾸미기를 반복하면서 대부분의 공간은 늘 무언가로 가득하다. 조용한 카페조차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곳이 없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더러는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카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빈 공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시의 생리이기도 하지만 뭐든 가득 채운다고 해서 반드시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갖는 미덕이 있다.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은 마음을 향하게 된다. '사색'하는 인간의 시간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색의 시간은 적막과 고요를 요구한다.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소란 속에서 제대로 생각에 몰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일주일에 하루 혼자 평일 산행을 감행하곤 하는데 그것은 빈 길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말(言語)을 버리고 싶은 욕구에서이다.

나는 등정주의자도 아니고 무심을 즐기는 산책주의자도 아니다. 내가 하루 종일 산길을 천천히 오르내리며 하는 것은 무수한 잡생각들이다. 아무리 끊으려 해도 생각은 생각을 몰고 온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적막한 산길의 선물이라 여기며 마음껏 즐긴다. 길 위에서 생각을 끝까지 해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도인처럼 마음을 비우지는 못하지만 생각의 가닥들은 어느새 정돈된다. 버려야 할 것과 안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비어있는 공간이 끝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들의 일상이 허약한 비만을 앓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채우는 일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상태를 사람들은 견디지 못한다. 공간이든 마음이든 비어있는 것은 모두 결핍으로 환원시킨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을 보면, 주인공 R의 부인이 시집올 때 사온 커다란 보루네오 옷장 때문에 다리를 펴지 못하고 자는 아이러니컬한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쉴 공간을 가구가 점령해버린 것이다. 우리의 삶도 종종 이와 닮아 있는 것이 아닐까?

과식을 하면 뱃속을 어느 정도 비워야 편해진다. 번잡한 사회생활에 휩쓸리다 보면 머리도 좀 비워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볼거리가 좀 덜 해야 눈도 편해진다. 소리에 시달리다보면 침묵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뱃속을 채우라 하고 머리를 굴리라 하고 이미지를 소비하라고 강요한다.

풍요의 극치는 여백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달과 별이 아름다운 것은 넓은 밤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그림은 답답하고 여백이 없는 사람은 숨 막힌다. 심지어 여백이 없으면 폭발한다. 창고처럼 채워진 우리들의 일상. 복잡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역전된 사고가 더 긴요할지도 모른다. 욕망의 공터가 넓어지면 내적 고통의 무게도 적어질 가능성이 있다. 정신이든 몸이든 빈 곳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움직임은 생명력이다. 빈 곳이 움직임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