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정진오기자]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우는 등 강화학파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 선생의 가계가 복원됐다. 또한 하곡의 후손과 혼인으로 맺어진 강화학파 학자들의 묘지 10여기가 강화도에서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한 '전국향토문화공모전'에서 최우수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은 양태부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전 사무국장의 논문('하곡 정제두의 가계와 강화학파 묘지발견조시')을 통해 확인됐다.

그동안 하곡은 주자학을 주류로 했던 조선 중기 서울의 학풍에서 떠밀려 강화에 온 것으로 소개됐지만 이 논문으로 하곡의 집안은 안동 권씨, 창원 황씨 가문과의 혼인관계로 이미 강화에서 수대째 사회·경제적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양명학·강화학파 등은 그동안 학계에서 철학이나 문학 분야에서만 다뤄졌던 반면 양 전 사무국장은 보학(譜學)을 통해 하곡의 가계를 정리하는 한편 족보에만 소개됐던 이충익, 이면백 등 유명한 다음 세대 학자의 묘지와 애국계몽기에 설립했던 사립학교 '계명의숙'의 옛터까지 찾아냈다.

이로써 왕족의 유배지로만 소개됐던 강화는 유력 가문(서인)들의 오랜 세거지였고, 이같은 풍토속에서 강화학파는 독립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게 드러난 셈이다.

양 전 사무국장은 하곡의 후손들이 안동 권씨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가계를 따지기 시작했다.

하곡의 고조부인 정구응은 안동 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 권적(1470∼1531)의 손녀와 결혼하면서 두 집안은 이어졌다. 또한 정구응의 손자인 정유성대에는 지역토호인 창원 황씨 집안과 혼맥을 맺었다. 이처럼 영일 정씨 가계는 집권 서인의 유력 가문과 혼맥으로 엮어졌던 것이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하곡이 당시 사문난적으로 배척당했던 양명학을 죽을 때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와 당대의 유력한 집안내 덕분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혼인 관계를 추적하면서 양 전 사무국장은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이 권씨 집안의 둘째 사위였던 사실도 밝혀냈다.

또한 경재 이건승(1858∼1924)의 '가승(家乘)' 필사본을 발견한 양 전 사무국장은 강화학파 뒷 세대인 이충익, 이면백, 이상학의 묘지와 이건승이 설립했던 '계명의숙' 옛터를 강화도 곳곳에서 찾아냈고, 김포시 대곶면 쇄암리에 있는 정술인의 묘지도 함께 발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