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희 (숭실대 교수·문학평론가)
[경인일보=]"교수님은 크리스마스 선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어떤 것이었나요?" 연구실을 찾아온 1학년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나는 이런 사소한 질문에 오히려 당혹하곤 한다. 이런저런 선물을 받기도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 어느 순간 크리스마스와 관련한 즐거운 추억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머뭇거리다 "종합선물세트"라고 답한다. 사십 번이 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과자와 사탕이 가득 든 종합선물세트보다 더 값비싼 선물을 받기도 했었는데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종합선물세트 이상을 능가한 것이 없었던 듯싶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오빠와 언니, 나는 제사 때나 다락에서 꺼내는 커다란 교자상을 펼쳐놓고 친구들에게 보낼 카드를 만들었다. 당시 우리들 대부분은 카드 살 돈이 없었다. 물감과 색연필, 물통, 붓, 도화지, 풀, 가위 등을 어질러 놓고 각자 무엇을 그릴지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

언제나 제일 먼저 붓을 잡는 것은 오빠였다. 오빠는 쓱쓱 하얀 눈사람과 나무를 그린다. 그 앞을 루돌프가 끄는 설매를 타고 산타 할아버지가 웃으며 지나간다. 그러면 언니와 나도 눈사람과 나무를 따라 그린다.

한 번은 검은 도화지 위에 눈사람과 나무를 그리던 오빠가 칫솔에 하얀 물감을 찍더니 엄지손톱으로 긁어 하얀 눈가루를 도화지에 뿌리기도 했었다. 그때 검은 도화지에 뿌려지던 눈가루는 정말 놀라운 환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엉성하기 그지없는 그림들이지만 나는 카드가 완성될 때마다 행복한 기분이 들곤 했다. 각자 대여섯 장의 카드가 완성되면 우린 조용히 그 안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사실 침묵 속에서 우리가 비밀스럽게 써 내려간 글줄은 '즐거운 성탄을! 내년에도 변함없는 우정을 간직하자!'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친구를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만든 카드에 이 같은 글을 쓸 때부터 난 내가 받을 친구의 카드를 떠올리며 가슴 벅차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우린 저녁 내내 아버지를 기다렸다. 일 년에 단 한번만 받을 수 있는 종합선물 상자에 올해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가 든 종이 봉투와 종합선물세트를 들고 마루로 올라오는 아버지! 그야말로 산타 클로스의 화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린 재빠르게 상자를 받아 둘러앉는다. 개봉박두! 그것은 꿈이 현실로 확인된 보물창고였다.

"너희들은 올 크리스마스때 무엇을 할 거니?" 내가 묻자 여학생 하나가 "그냥 친구들과 맥주 마시며 수다 떨고 놀기로 했어요." 남학생은 "저는 정읍에서 올라 왔는데 처음 서울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라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구경하려고요"라고 답한다. "그래 즐거운 날에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좋지. 너희들 노는 방식에도 수준이 있다는 사실 아니?" 나는 웃으면서 한 마디 더 보탠다. "잘 노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인지도 몰라."

추억은 모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자신이 경험한 추억이 그 무엇보다 소중할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도 1960년대식 크리스마스 풍경이 제일 아름다운 것으로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나를 찾아왔던 학생들도 자신들의 세대가 경험했던 크리스마스 풍경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궁핍했던 1960년대식 크리스마스에는 지금보다 훨씬 큰 심리적 풍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대형 서점에서 파는 현란한 카드가 어린 시절 붓으로 그렸던 카드만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친구를 생각하며 오랜 시간 공들여 그렸던 그 겨울나무들과 눈사람이 사라진 세계.

시간은 결코 거꾸로 갈 수 없다. 그 사이에 일어나는 결핍과 풍요의 변전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선물과 카드를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낼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정 깊은 선물과 카드를 보내시길…. 다정함으로 서로의 보물상자에 작은 꿈을 담으시길…. 무엇보다 많이 웃으시길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