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할만한 상황 덕분인지 저출산 문제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지난 달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에서는 '저출산 대응방안'을 제시했고, 국회는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의 활동기간을 연장해 "제도개선과 정책지원 방안을 강구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언론에서도 저출산의 원인과 보육환경 실태를 짚어보고 해외의 출산장려정책을 조사하는 등 해법 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정책은 반길만한 것이지만, 최근 논의의 핵심은 '비용'과 '시설' 문제를 맴돌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정부는 현재 불임부부 시험관 아기 시술 비용, 출산 전 진료비, 출산 축하금 등 다양한 출산장려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급기야 육아비용 경감이라는 명목으로 취학연령을 1세 낮추는 방안까지 내놓았다. 또한 여론 조사와 보고서는 우리 사회 저출산의 '주범'이자 '열쇠'가 '돈' 문제에 있다고 진단한다. 과도한 양육비, 교육비는 출산을 가로막는 주요한 원인이며 가족정책 지출 부문의 낮은 예산은 그 해법을 어렵게 만드는 문제적 상황으로 지목된다. 믿고 맡길 만한 보육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정부의 예산지원 역시 저출산 대책 가운데 우선 순위로 거론되는 사안이다.
경제적 부담과 열악한 보육환경은 젊은 부부들이 출산을 꺼리게 만들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가정에 적지 않은 곤란을 가져오는 요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과정에서 겪는 실질적인 어려움은 '비용'이나 '시설' 등의 물질적 조건에 국한되지 않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출산을 계기로 부모 역할 수행자가 소화해야 하는 다중 역할과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역할 갈등에 있다.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면서 부모역할 수행자는 갑작스럽게 여러 종류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기대되거나 때론 강요받는다. 남성과 여성 모두 한 아이의 아버지(어머니)로서, 남편(아내)이자 아들(딸), 사위(며느리) 그리고 하나의 사회인으로서 서로 다른 역할 사이에서 결혼 전에 비해 심한 혼란과 갈등을 마주하게 된다. 문제는 두 개 이상의 역할이 동시에 갈등이나 충돌을 빚을 때 심각하게 발생하는데,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일하는 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특히 가중된다.
예를 들면, 근무 중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한국의 직장 여성이 아이를 이유로 선뜻 조기 퇴근을 하기 쉽지 않다. 사무실 상황을 살피며 애간장을 끓이는 동안 여성은 다중 역할의 딜레마를 겪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선택을 하건, 한편에서는 업무 태만이라는 이유로, 다른 한편에서는 매정한 엄마라는 이유로 비난받는 일이 다반사다. 여성에 대한 판단 기준은 상황에 따라 혹은 칼자루를 쥔 주인의 편리에 따라 매번 달리 적용된다.
동일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에게 적용되는 잣대가 다르다는 점도 한몫한다. 가령,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일하는 남성은 성실한 직장인으로 평가받지만, 여성이 같은 경우에 있다면 일 중독자거나 업무 능력이 부족한 직원 또는 가정에 불충실한 주부로 낙인찍힌다. 이같은 역할 갈등이 바로 미혼여성들이 결혼을 미루고, 예비부모들이 임신과 출산을 선뜻 결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몇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부담이다. 출산과 육아의 당당한 주체가 되어야 할 부모역할 수행자가 겪는 다중역할 딜레마는 저출산 문제를 야기하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사회 (예비)부모들이 겪는 다중역할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가정, 직장, 사회가 분담할 때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해법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