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환 (한글문화연대대표·방송인)
[경인일보=]지난 10월 9일 한글날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섰다. 제막식이 있었던 그 날, 한글학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찾아 세종 동상을 맞이했다. 바라보고 웃고 박수치고 모처럼 광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세종대왕 동상 바로 뒤 꽃밭의 이름이 '플라워카펫'이란 사실은 시민들로 하여금 조소를 금치 못하게 했지만, 한글이 새겨진 옷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예뻤다. 뿐만 아니라 홀로 향을 피우고 광장 바닥에 엎드려 곱게 절을 올리던 한 아주머니의 뒷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지난 11월 초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대왕 동상 앞에 영어로 'WATER'라고 쓴 대형 입체 조형물이 등장한 것이다. 마치 거대한 조각품과도 같은 'WATER'라는 영문자가 세종대왕 앞을 막아섰다. 참으로 이상한 풍경이었다.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드신 임금 앞에 마치 그 한글을 거세라도 하듯이 영어로 된 거대한 조형물을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물론 그것은 후손들 모두의 생각이 아니었다. 한국방송광고공사가 2009년 대한민국공익광고제를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공익광고에 대한 사회적 관심 확대와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대한민국 공익광고제' 창작공모전의 2009년 주제는 '물'이었다.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직접 밝혔듯이 그것은 분명 'WATER'가 아닌 '물'이었다. 그런데 광장에 등장한 것은 '물'이 아닌 'WATER'였다. 여러 나라가 참가하는 국제대회였기 때문에 'WATER'가 됐다는 궁색한 해명이 따라붙었다. 국제대회일수록 '한글'을 앞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일까? '물' 혹은 '물water'와 같은 형태의 조형물은 왜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글문화연대의 정식 항의와 이건범 정책위원의 1인 시위 그리고 이 문제를 발 빠르게 보도해 준 언론 덕에 볼썽사나운 조형물이 행사 도중 철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지적을 해도 진정을 해도 부탁을 해도 항의를 해도 우이독경인 관청이나 공기관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11월 23일에는 한글 단체들이 모여 세종대왕 동상 앞을 한글 우선 사용 지역으로 선포하는 행사를 열었다. 세종대왕의 동상 앞에서만이라도 한글 존중의 삶을 실천하고 그 곳만이라도 한글 청정지역으로 지켜나가자는 뜻이다.

요즘 날마다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주요 쟁점 중 하나가 세종시 문제이다. 원안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정부의 생각과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원안대로 진행할 것을 약속했었지만 당시 그렇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수정 의지를 밝혔고, 며칠 후 같은 당 이완구 충남지사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퇴를 발표했다. 정치가는 신뢰가 생명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 반면 정치가는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꿀 수도 있어야 한단다. 그러고 보면 말을 바꿔서도 안 되고 바꾸지 않아도 안 되는 것이 정치가의 본성인 모양이다.

원안대로든 수정안으로든 결국 세종시는 건설될 것이다. 세종시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세종'을 따왔다. 최근 몇 년 사이 외국어와 외래어의 범람으로 온 나라가 어지럽다. 이 나라가 한글의 나라란 사실조차 망각할 지경이다. 하지만 한글 나라의 자존심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세종시를 한글 우선 사용 도시로 정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세종시에서만큼은 세종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고, 세종시만큼은 한글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어야 한다. 한글의 힘으로 세계 무대에 당당히 설 대한민국의 미래를 세종시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늦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