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것은 '서유기'가 단지 아동물로만 취급되는 통에 모험이야기라는 일차원적인 측면만 강조되고 이 작품을 관통하는 차별에 저항하는 하위 주체, 지배계급의 정치적 책략과 대결 방식에 대한 고발, 고도의 풍자정신과 화해를 만들어내는 민중적 세계관의 중요성은 종종 망각된다는 점이다. 사실 고전을 축약본으로 읽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더구나 '서유기' 같이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그 유쾌한 상상 뒤편에 대놓고는 말할 수 없어 숨겨진 복잡하고도 예민한 이야기가 첩첩이 쌓여있게 마련이고 이것을 곱씹으며 음미하는 맛이야말로 비할 데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서유기' 제10회의 '당 태종, 저승에 갔다 환생하다'라는 부분이 있다. 뜻하지 않은 저승송사에 걸려 저승으로 출두한 당 태종의 이야기다. 당 태종 이세민은 저승에서 자신 때문에 숨진 많은 귀신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당 태종을 '세민'이라 부르며 자신의 목숨을 돌려달라 원망한다. 요즘에야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사람의 실명은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름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만 사용했다. 높은 가문에서는 아이조차 아명을 따로 지어 불렀으며 성년이 되면 동년배에서 쓸 이름 자(字)를 짓거나 호(號)를 따로 지어 이름을 부르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 하물며 국왕의 이름이랴. 게다가 대당의 황제를! 그러나 귀신들은 "세민이가 왔다! 세민이가 왔어!" 소리치며 당 태종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진다. 참혹한 귀신의 세계에서 두려움에 떠는 황제 또한 한 명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승세계의 권위가 여지없이 무너진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절대권력자 황제라고 해도 송사에 걸리면 어김없이 출두해야 하는 세상은 이미 천년 전부터 민중들이 꿈꿔왔던 것이다. 이세민은 저승에 보물창고를 가진 사람의 재물을 빌려 귀신들에게 넘겨주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저승에 열세 개의 보물창고를 갖고 있다가 이세민에게 재물을 빌려준 사람이다. 하남 개봉부의 상량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부부는 가난한 물장수에 옹기장수였다. 이들은 소박하게 살면서도 족함을 알았으며 보시하고 선행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의 보시와 선행이 저승에 쌓여 열세 개의 보물창고가 있었던 것이다. 황제였지만 보물창고 하나 없어 남의 재물을 꾸어야 했던 이세민과 열세 개의 보물창고를 지닌 가난한 물장수, 옹기장수의 대비는 선명하다. 없이 살아도 이웃을 사랑하고 가진 게 많지 않아도 함께 나누는 삶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아름답다.
나날이 추워지고 있다. 추위는 빈곤을 더욱 치명적으로 만든다. 더운 절기에야 노숙을 한다해도 죽을 리 없지만 추위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 허술한 보일러는 얼어터지기 십상이고 식료품의 가격도 여름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올해는 유례없는 불황도 불황이려니와 법인세 감면을 전제로 내는 기업 기부금 등이 모두 월전의 인천세계도시축전에 쓰여 더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여러 시설에서는 겨우살이에 꼭 필요한 예산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근심이 태산같다. 연말연시에 이웃과 더불어 즐기는 것은 우리의 오랜 풍속이었다. 저승에 보물창고 하나 없는 이승의 권력자는 일단 제쳐두고 없이 살아도 이웃과 함께하며 삶의 온기를 만들어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