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태순 (변호사)
[경인일보=]4계절 중 하나인 '봄'을 왜 '봄'이라고 부를까?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법연수원에 입소하는 연수생들을 상대로 한 첫 수업시간에 필자가 그와 같은 질문을 하곤 하였다.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봄'은 '보다'의 명사형이고, 봄에 여러 새로운 생물들을 보게 되어서 그와 같이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설명을 하곤 하였다. 그러다 보면 '여름'은 '열다'의 명사형이고, '가을'은 아마도 '가다'에서 유래되고, '겨울'은 '겨우 살다'의 뜻을 가진 명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설명을 하곤 하였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가을의 전설'의 영어 제목이 'The legend of fall'이라는 것을 보고 오역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한 가족의 몰락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fall'을 '가을'이 아니라 '몰락'으로 번역해야 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영화 공급사의 입장에서는 '몰락의 전설'이라는 것보다 '가을의 전설'이라는 영화 제목이 흥행에 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서 의도적으로 오역을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렇지만 '가을'이라는 우리말의 어원이 '가다'에서 온 것이라면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그 뒤에 들었다.

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세대라면 경찰관들을 '짭새'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경찰관들을 '짭새'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필자 또한 한참 후에야 '짭새'라는 것은 '잡다'와 사람을 뜻하는 접미어인 '쇠'의 합성어인 '잡쇠'가 그 어원이며, 사람들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짭새'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용하는 단어들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탄생하고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쳐 통용되게 된다. 이런 약속을 거부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이 쓴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책을 고등학생 시절에 읽고 사고방식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 주인공은 어느날 왜 책상을 책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자신은 달라져야겠다고 마음 먹고 책상을 '사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주위의 모든 사물들에 대한 명칭을 새로 바꾸어버리는 이야기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잿빛 외투를 입은 그 나이 많은 남자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사회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수많은 약속들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약속들을 지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가끔은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으나 이런 것은 기존의 언어를 토대로 만들어지고 사회 구성원의 동의를 얻어 통용되는 것이다.

요즘 겨울은 춥지도 않고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아 '겨우 살다'는 의미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겨울이라는 이름을 바꾸기 힘들 것이다. 근래들어 정치인들의 언어를 보면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원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론'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본 생각' 정도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얼마전 연말 모임에서 어떤 국회의원으로부터 '조배죽'이라는 건배사를 들었다. 그 뜻은 '조국을 배신하면 죽는다'는 뜻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가끔 사적 모임에서는 '조국' 대신 '조직'을 뜻한다는 설명과 함께. 정치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국'을 '조직'이라는 의미로 쓰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