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월 (한서대 교수·극작가)
[경인일보=]아주 오래 전 일이다. 유치원에 다니던 딸아이가 책을 읽다 말고 달려와 엄마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뻤던 일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대체로 '제일'이나 '가장' 같은 말을 들으면 일단 긴장부터 하는 편이다. 그 많은 것들 중 어느 하나를 딱 골라내라는 것이 늘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바로 대답을 못하고 자못 진지하게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내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 몇 가지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딸아이는 거의 울 지경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딸이 말하기를 책에 나오는 엄마는 같은 질문에 대해서 "너를 낳았을 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 내가 천하에 이기적인데다 생각도 모자라고 사랑도 부족한 빵점짜리 엄마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말로 그 사태를 수습해보려 했지만 어떤 말로도 아이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줄 수는 없었다.

다음날 나는 커다란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사다가 딸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딸은 너무 커다란 리본을 보고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너는 우리집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이야. 네 생일도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네가 태어난 거는 우리에게 가장 기쁜 일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야." 딸은 겨우 마음이 풀려서 선물 포장 같이 커다란 리본 머리띠를 한동안 하고 다녔다.

그리곤 놀다가 집에 들어올 때면 "엄마, 선물 왔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엄마, 난 선물이잖아"와 " 넌 우리집 선물이잖아"를 지치지도 않고 서로 읊어대며 지냈다.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딸을 생각하니 참으로 즐거운 추억이다.

성탄절이 되면 서로를 기억하며 선물을 준비하고 나누기를 한다. 좋은 일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그동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돌아보고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책 한 권이든 시디 한 장이든 고르는 일은 얼마나 마음 따뜻한 일인가.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나 자신이 누구에겐가 선물이 되고 누군가가 또한 나에게 선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너무나 거창하다면 내가 건네는 사소한 말 한마디가 선물이 되고 누군가의 웃음 띤 얼굴이 나에게 와서 선물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실패와 좌절과 슬픔이 가득한 거친 세상에서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을 위로할 수 있는 따뜻한 손들이 서로에게 선물이 되면 좋겠다. 잊어야 할 사소한 일들을 마음 속에 산처럼 쌓아두고 아름답지 못한 그것들에 치여 살면서 정작 소중한 것들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살아야 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오늘은 성탄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이다. 평범한 인간의 몸을 하고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비소한 인간의 희로애락을 탓하지 않고 이해해주신 참으로 너그러우신 분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이 두려워 밤새 기도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주셨다.

반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을 직접 자기 손으로 만져야만 믿을 수 있다고 했던 제자 도마의 모습을 닮았다. 그런 믿음 없는 자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지만 성탄절이 되면 그래도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 되시는 분이 계셔 문득 세상이 밝아진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도 성탄절만 되면 온세상 사람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시는 분, 그토록 멋대로 살다가 하루만이라도 한없이 선해지는 우리 모두를 나무라지 않고 그저 감싸 안으시는 분, 그분이 우리 모두에게 가없는 선물이듯 우리는 다만 몇 사람에게라도 선물이 되면 좋겠다.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인 딸에게 어린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시 한번 선물타령하면서 웃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