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식 (전 경주대 총장)
[경인일보=]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는 뜸을 제대로 들여야 밥맛이 난다. 전기밥솥에 지은 밥을 먹는 요즘 사람들은 뜸을 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모를 수도 있다. 맑은 물에 잘 일은 쌀을 가마솥 바닥에 펼치듯 깔아놓고, 그 위에 굵은 완두콩을 한 움큼 넣은 다음 손등으로 물 대중을 마치고 난 뒤에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부지깽이에 파란불이 붙을 만큼 불을 때고 나면 무거운 솥뚜껑이 들썩거리며 밥물이 '푸르르' 하고 눈물처럼 넘는다.

이때가 불을 때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 시점이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밥물도 더 이상 넘지 않는다. 그러나 가마솥 밖에서는 불 때는 것을 멈추었지만 가마솥 안에서는 멈추지 않은 뜨거운 열기가 고루고루 밥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뜸을 들인다'고 한다. 뜸 들이는 시간에 엄마는 솥뚜껑을 행주로 정성스레 닦고 담 밑에 묻힌 김장독에서 꺼낸 묵은지를 더하여 반찬을 준비하는 것이다.

뜸을 다 들이고 난 뒤에는 잠시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 다시 불을 땔 때는 애써 별도로 땔거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태우다 남은 곁가지나 부엌바닥을 쓸어 모은 지푸라기정도만 아궁이에 넣고 태워도 충분한 것이다. 다시 불을 땔 때에는 더 이상 밥물이 넘지 않는다. 대신 솥 밑바닥에서 '타닥타닥' 누룽지 타는 소리가 구수한 냄새와 함께 들려온다.

뜸을 정부의 정책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자. 나라의 정책에도 밥을 짓는 것처럼 뜸을 들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간 정부가 어떤 정책에 막대한 예산과 정성을 쏟았다면 그 정책이 성숙하고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기다리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밥물이 넘는 데도 계속해서 불을 때는 것은 밥맛을 버릴 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아까운 밥을 태울 뿐이다.

정책에 뜸을 들인다는 것은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불을 때는 것을 멈춘 정책의 가마솥 바깥과는 달리 가마솥 안은 그리 고요하지 않다. 정책의 열기와 효과가 골고루 전달되고 공유하는 뜸의 시간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책의 뜸은 포기나 휴식이 아니라 정책의 성공을 위한 소통과 성숙의 시간이다. 뜸을 들이는 시간은 정책의 완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의 용기'의 시간인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든든한 국민의 신뢰'의 시간이다.

뜸은 정책과 정책현실의 불일치를 조절하는 시간적 장치이다. 정책이 필요한 사회적 여건과 때가 아직 채 이르지 않았는데도, 유능하고 부지런한 정부는 때로는 앞당겨 정책을 구상하고 이의 마련을 서두르기도 한다. 이런 정책은 대부분 그 당시로서는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정책의 효과가 지금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정책이 실패했다고 지레 짐작하여 그간 추진해온 모든 노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더 많은 예산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뜸의 시간은 이러한 정책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의 모순된 것을 일치하게 하는 효과적인 기제로 작용한다. 그래서 뜸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정책의 필요성과 신뢰에 대한 '공동체내의 합의와 소통을 위한 무엇인가를 하는 시간'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모든 정책은 가지고 있는 결함을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확한 미래예측과 깊은 현실적 고려 없이 이루어진 대부분의 정책들이 실패하지 않고 연착하는 사례들은 정책의 설계가 잘된 것이 아니라 이 뜸이라는 과정을 잘 활용하여 정책이 가지고 있는 결함을 스스로 잘 치유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동시에 비교적 잘 설계된 정책이 뜸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 실패한 사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가마솥 밥을 짓는데 보여준 우리 조상들의 지혜 속에서 오늘도 우리는 배운다. 우리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의 가장 큰 해결자는 결국 시간'이라는 겸허한 생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