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희 (숭실대 교수·문학평론가)
[경인일보=]인간관계를 잘 유지시키고 그것의 가치를 더욱 깊은 것으로 발전시키는 교감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혈육의 정이든 우정이든 연인 간의 사랑이든 자신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상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하다. 한 마디의 말이나 몸짓, 함께 나누는 음식, 편지, 꽃, 선물 등이 그런 매개 역할을 한다. 인간에겐 받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주고 싶은 욕망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우리의 내면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이다. 내용이 마음이라면 형식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 합당한 표현 형식을 찾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부족한 애정표현은 인색한 느낌 때문에 관계의 긴밀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과도한 애정 표현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나아가서는 애정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자연스러운 친밀감 형성에 방해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를 위한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상대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는 어떤 교감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가?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요즘 가장 성행하는 최고의 표현 방식은 '깜짝 이벤트'이다. 사람들은 수많은 기념일을 만들고 기념일마다 파티를 기획한다. 심지어는 특정 공간을 통째로 빌려 수많은 촛불로 하트를 만들고 백 송이의 장미와 와인으로 식탁을 장식해 놓음으로써 상대를 더 할 수 없는 감동에 싸이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상대에게 감동의 물결을 안겨주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다 TV 드라마에서 배운 몰개성한 방법이다.

요즘 사람들은 왜 기념일에 그토록 매달리는 걸까?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것은 그 기념 대상의 의미를 더욱 증폭시키고 기억하겠다는 의도이다. 좋은 날, 좋은 의미를 함께 되새김으로써 우리는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벤트를 준비하는 사람들. 그 순간을 영원과 바꾸고 싶은 사람들.

여기에는 현대인의 다양한 심리적 상황이 함의되어 있다. 이것저것 기념할 것들을 챙기며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거듭 확인한다. 이는 역으로 인간과 인간 관계의 끈이 예전처럼 단단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 상대적으로 진실에 대한 확인 욕구도 커진다. 그 공허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표현방식이 점점 현란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벤트 신드롬에는 권태의 심리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추종하는 현대인들에게 지루함이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종의 '악(惡)'이다. 새로움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것을 소유하거나 소비하지 못하는 자는 낙오자이다. 이제 삶의 질은 매일 쏟아져 나오는 새로움을 얼마만큼 누리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들이 진부한 마음 표현 방식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 낡아버리는 게 현대의 새로움 아니던가!

사람들이 깜짝 이벤트를 통해 얻는 것은 상대의 마음일까 아니면 순간의 오락적 재미일까? 아끼는 사람과 오락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 또한 좋은 일일 것이다. 그 즐거움이 마음을 하나로 묶어준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애쓴 결과가 그리 오래가지 않는 것이 지금의 세태이다. 정성을 드린 만큼 보람도 비례해야 하는 것이 경제원리라면 깜짝 이벤트의 경제 효과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는 것 같지 않다. 의도와 다른 효과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분명 심리적, 물질적 낭비이다.

책이 가장 소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가장 받고 싶지 않은 선물 1위가 책이다. 책은 물질로 이루어진 비물질적 사물이다. 사실 사랑도 우정도 비물질이다. 마음과 뜻과 정신만으로는 상대를 사로잡을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우리는 정성과 물질이 일대일 대응 관계가 된 사회에서 가장 내실이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교감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