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G20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리고 우리는 그 의장국이다. 당장 2월에는 G20 정상회의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재무차관 회의가 인천에서 개최된다. 1년 내내 G20 얘기가 끊이지 않을 듯 보인다. 또한 올해는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이자 한국전쟁·인천상륙작전 60주년이다. 정부는 물론이고 각 분야별로 많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지방선거까지 있다.
우리 사회는 이들 대형 이벤트를 잘 치러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벌써부터 우리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보혁갈등'의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G20 의장국으로서 우리나라는 그에 맞는 국격을 갖췄는가. 우리는 그 국민의 격을 품고는 있나. 1월이 가기 전에 한번쯤 생각해 보자.
작년 일인데 기자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지난해 10월 이집트 수에즈 무바락스타디움에서 펼쳐진 청소년월드컵 한국과 미국과의 경기다. 한국이 미국을 3-0으로 대파한 선수들의 기량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바로 그라운드를 둘러싼 광고판. 소니, 코카콜라, 현대, 아디다스 등의 상업광고판이 즐비한 가운데 'SAY NO TO RACISM'이라고 쓰인 노란 바탕의 광고판이었다. '인종차별 반대'란 문구를 축구경기장에서 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터라 당시 받은 강한 인상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대통령은 G20 의장국으로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를 잇는 중재자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우리는 과연 'SAY NO TO RACISM'란 외침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에게 우리는 마음의 문을 제대로 열고는 있는가. 불과 100여 년 전 우리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그저 미개한 종족에 불과했다.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의 소설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에는 당시 러시아인들이 동양인들을 얼마나 깔봤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전투에 참여한 러시아 수병들은 "황인종들이 방금 어뢰 두 발을 발사했다" "황색 난쟁이들과 싸울거야!"라고 말한다.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러시아 장교는 전함 카레예츠호를 폭파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카레예츠호를 황색 난쟁이들의 손에 넘길 수는 없어!"라고 내뱉는다. 러시아인들의 눈에는 일본이나 한국 사람이 '황인종' '황색 난쟁이'로 밖에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제물포해전이 도화선이 돼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었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국권회복을 노렸으나, 당시 헤이그에 모인 44개국 대표단은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결국 일제는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했다. 100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중재자'는 양쪽을 모두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강대국도 저개발국도, 보수도 진보도 다 품을 수 있는 자세를 갖는 것, 진정한 G20 의장국의 격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