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전 '옹고집전'은 비상하게 철학적이다. 이 작품에서 진짜 옹가와 가짜 옹가가 하나는 악인이고 하나는 이를 벌하기 위한 가짜라는 사실을 잠깐 괄호치고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만약 우리와 똑같은 누군가가 있어서 진위를 판별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사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면 전제의 진위에 좌우된다. 참인 전제에서 참인 결론이 나오고 거짓인 전제에서 거짓인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도저한 자기분열의 상황에서 거울처럼 마주 서 있는 두 명의 옹가는 스스로는 진위를 판별해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 근거이다.
두 옹가에게 첫 번째로 제시된 판단근거는 옷에 뚫린 구멍이다. 의식주(衣食住)라, 사람에게 필수적인 요소라면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인데 그중에서도 옷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람을 판별하는 데 첫 번째로 사용하는 판단기준이다. 그러나 옷에 난 불구멍쯤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로 닥친 근거는 신체적 증거이다. 사람이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가. 눈이 큰가? 코가 오똑한가? 옹가 정수리에는 금이 있고 그 한 가운데에 흰털이 있단다. 그러나 머리카락 또한 얼마든지 나고 자라고 빠질 수 있는 것이니 무엇으로 옹가를 판별하는가? 두 옹가를 발가벗겨 놓고 비교해 보지만, 우리가 목욕탕에서 느낄 수 있듯, 사람이란 오히려 겉치레를 버릴수록 그 차이가 적어지는 법이다. 세 번째로 이들은 법의 판정을 원한다. 사실 문학 속에서 한국인들은 기이하게 준법정신이 투철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귀신이 된 장화 홍련이마저도 귀신이 가진 초능력으로 원수를 갚는 게 아니라 굳이 관장 앞에 나타나 소송을 제기하는 형편이니 다른 경우야 일러 무엇하랴. 옹당촌의 사또는 옹가에게 조상을 묻고 가솔을 묻고 재산을 묻는다. 그리고 이에 대해 훨씬 더 풍부한 정보를 지닌 옹가를 진짜로 판정한다.
그러나 사실은 법의 판단이 있기 전부터 두 옹가 중 하나가 이미 가족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아내와의 첫날밤을 회고하면서 둘 만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자신이 진짜 남편임을 호소하는 옹가, 시집오던 신행길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며느리에게 자신이 진짜 시아비임을 호소하는 옹가 앞에서 가족들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이는 의미심장하다. 법이란 사실 우리 자신이 지닌 정의감정이 추인하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법관은 법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이미 존재한다.
역사에 유례 없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두 명의 위원장이 출근하고 있다. 애초 두 명의 옹가가 생겨난 이유가 그러했듯 두 명의 위원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인사권자의 불측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법의 판정이 있기 전부터 사람들은 김모 위원장의 인품과 자질을 믿고 있었고 그 해임이 옳지 않고 부당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옹고집전'의 결말은 그렇다. 옹가가 불측하고 무례한 마음을 버리자 한 명의 옹가가 사라지고 평화와 행복이 찾아왔다. 생각해보면 다른 결론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마음에서 얻은 병은 반드시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하고 방울을 떼는 건 애초에 방울을 단 사람이 해야 하리라.(心病終須心藥治 解鈴還是繫鈴人)' 옛시에 이른 그대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