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진현 (인천민예총 정책위원장)
[경인일보=]'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이 있다.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태양왕 루이14세의 말이다. 고등학교 윤리시간, 선생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셨다. 이 말을 요즘에 맞춰 고치면 무엇이라 할 수 있느냐고. 우리 머릿속에서는 초급 산수가 시작되었다. '짐'은 '왕'을 말하는 거니까 요즘으로 고치면 '대통령'인가? 뭔가 계산이 꼬여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누군가의 입에서 결국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날 우리는 선생님께 꾸중을 들으면서 남은 수업 내내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배워야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말은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은 현대식으로 고치면 '국민이 곧 국가다'.

이 날의 부끄러움은 오래 남았다. 나는 왜 그때 어리석게도 '대통령'이라는 낱말을 입안에 굴리고 있었던가. 왜 옛날의 왕을 대통령이 대신한다고 생각했던가? 내 자신과 화해하게 된 것은 그 어리석은 생각이 내가 스스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주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였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제왕처럼 군림하는 대통령의 지배를 받았다. 공포가 일상이었다. 두려움 속에서 창발적인 생각이 나올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여 눈에 띄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으면서 중간이나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저항은 물론이요, 모든 반대, 모든 이견까지도 무조건 나쁜 것이었다. 이리저리 재보고 따져보는 논리적 사고조차 환영받지 못하였다. 따지기 좋아하는 아이는 건방지고 주제넘는 아이였고 부모는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모르는' 아이를 당사자와 집안의 안녕을 위해서 더 심하게 통제해야만 했다. 그렇게 자란 우리가 '왕' 대신 '대통령'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오답의 책임은 일개 청소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니다', '싫다' 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빼앗고 건강한 비평과 비판과 토론을 부정한 독재정권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민주주의의 성장은 단순히 독재정권의 청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은 공포를 조장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던 일상의 파시즘을 이겨내고 있었다. 지난 2008년 국민 개개인의 건강권, 먹을거리를 선택할 수 있는 일상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켜졌던 촛불은 바로 한국이 도달한 일상적 민주주의 현장이었으며 일종의 문화사적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정권의 대응은 치졸하고 시대역행적이었다.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몰랐다며 두 번이나 사과를 했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곧 밝혀졌다. 그리고 이 정권은 국민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됐다. 누군가의 선동에 의하지 않고는 주체적인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무개를 구속하네, 누구를 잡아넣네, 어디를 기소하네…. 공포를 조장하는 정도가 도를 넘었다. 그러더니 결국은 '표현의 자유'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문화예술인을 직접 탄압하기 시작했고 2010년에는 지원단체로 선정된 수많은 문화예술단체가 광우병국민대책위원회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로 불법시위에 참여한 적이 없으며 참여사실이 밝혀지면 보조금을 반환하겠다는 내용의 행정절차에도 없던 확인서를 제출해야만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건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표현과 올곧은 정치적 비판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나쁜 것을 개선할 수 있단 말인가? 문화예술단체 지원금은 정권의 사유재산이 아니며 아첨하고 순종하는 이들에게만 정권 임의대로 베푸는 시혜도 아니다. 이것은 국민의 문화적 권리, 국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한 표현의 자유를 위해 국가가 수행해야 하는 의무의 일환인 것이다. 또한 국가의 정의를 정권이 독점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이 곧 국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권의 정의로 국가의 정의를 대체할 때, 우리는 그것을 독재라고 부른다. 더구나 돈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바꿔말하면 "너 지난번에 나한테 덤볐지? 안그랬다고 말하기 전에는 돈 못 줘!"인데 너무 치졸하지 않은가. 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빨리 포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