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어린 심청이가 눈 먼 아버지를 두고 죽으러 가는 것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는 일종의 신화적 상상으로서 식물이 겨울을 맞아 죽어야만 새봄을 맞아 부활하여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정지되었던 것처럼 보였던 생명이 재생하여 순환하는 자연계의 이치로부터, 또 그렇게 부활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기원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 읽어보면 심청이는 출천대효(出天大孝)이기는커녕 불효막심 불초자식이다. 하물며 제 손으로 목숨을 버림이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동의하듯 최고의 효도는 자식이 행복한 것이다. 가까이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자식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모든 부모의 소원이라고 해도 좋겠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가 살아온다는 것은 진실로 간절한 소망이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요컨대 팔려가는 심청이는 현실이요, 황후가 되어 맹인잔치를 여는 심청이는 상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해피엔딩에 의지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던가. 희생이란 결국 대체될 수 없는 애통절통한 손실이다. 생명을 살린다고 다른 생명을 잃는 일은 근본적으로 형용모순인 것이다. 일제의 가미카제 특공대나 자살테러를 조장하는 극단적 종교에서처럼 희생을 미화하는 문화는 수상쩍다. 희생은 애도되어야 할 일이고 재발되어서는 안되는 일이기에 기억되는 것이다.
즉 바뀌고 더 조심하기 위해 기억되는 것이지 찬양되고 모방되어야 할 일은 아니다. 꽃다운 것은 삶이고 생명이지 죽음이 아닌 것이다.
부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고황에 사무친 것은 아닌가 거듭 두렵다. 생명이야 모두 똑같이 귀한 것이지만 최근 전해들은 부음 중에 가장 비통한 것은 심청이가 몸을 던진 백령도 인당수에서 천안함의 침몰로 희생된 우리 소중한 장병들과 실종자 수색 구출작업에 나섰다가 순직한 고 한주호 준위의 죽음이다. 언론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지만 한주호 준위는 잠수에 관한 한 용왕도 무서워할 만큼 잠수의 달인, 잠수의 도사였다. 잠수에 필요한 안전수칙을 모를 리 없는 한 준위가 목숨을 잃은 것은 무리한 작업 때문이었다. 심해에 잠수하는 작업에서 반드시 경계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 '잠수병'이다. 잠수병은 잠수하는 사람이 바닷속 깊이 들어갔다가 수면으로 갑자기 올라올 때 혈액 속에 들어있는 질소가 기체로 바뀌어 혈관을 막는 치명적인 사고이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점진적으로 압력을 낮춰주는 감압챔버가 필수적이다. 어려운 수색작업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고는 물론이요, 혹여 침몰된 선체에서 구조될 가능성이 있는 선원들을 생각해서라도 감압챔버는 반드시 대비가 있어야 했다. 단적으로 가정해서 천안함의 장병을 구조했더라도 감압챔버 없이 이들을 어떻게 살릴 작정이었던가. 무리한 잠수작업으로 실신한 한주호 준위는 제때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결국 우리나라 함정도 아닌 미군 함정에서 순직하고 말았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다시 확인한다. 희생이 고귀한 것이라고 해서 강요해서는 안된다. 고귀한 희생에 당국의 무대책과 무능함이 숨겨져서는 더욱 안된다. 어정쩡한 사후보상으로 대체하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이세상의 중심은 모든 고귀한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귀한 생명이 재생되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이 같은 사고가 다시는 생기지 않는 것을 전제로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