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인정이 다시 뒤바뀐 건, 지난 달 서울 어느 사립대 재학생인 김예슬 학생이 대자보를 통해 밝힌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공개 자퇴서를 읽게 된 이후부터였다. 내가 유심히 본 건 그녀의 자퇴서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녀의 글씨, 그 자체였다. 그녀는 왜 많고 많은 형식 중에서도 굳이 '대자보'란 구세대의 대화창을 사용했을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이나 트위터도 아닌,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대자보를 이용했을까? 그것이 나는 궁금했고, 며칠 동안 계속 그 의문을 머릿속에 품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이유를 내멋대로,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공개 자퇴서'를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렸다고 치자. 그러면 그 다음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대자보 보단 더 많은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그녀의 글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은 사실 뻔하다. 그녀를 옹호하는 댓글들과, 그녀를 비난하는 댓글들, 양비론의 댓글들과, 농담의 댓글들이 속속 그 아래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댓글과 댓글끼리 서로 싸우는 일도 일어났을 것이며, 홈페이지 관리자는 이 글을 삭제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본 김예슬 학생 또한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논란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싶은 생각들이 슬몃슬몃 들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비단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의 문제만은 아니고, 트위터나 싸이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래서, 그녀는 '대자보'를 이용했다. 그것은 돌아갈 길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말이 아닌 어떤 행동의 의미가 더 컸다. 쉽게 수정되거나 삭제될 수 없는 행동.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수많은 이십대 청춘들이 저마다의 정치적 견해를 견지하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들과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들을 보란듯이 제시하고 있다. 그 의견들만 보면 과연 누가 그들을 정치적으로 무관한, 자신의 스펙 쌓기에만 열중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한데, 문제는 딱 거기까지만이다. 치열하게 담론은 오고 가지만, 언제나 담론은 담론 수준에서만 머물고 만다. 누군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면, 행동으로, 정당한 투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비아냥거림으로, 또 다른 담론으로만 맞설 뿐이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겐 참으로 고마운 현상이 아닐 수 없는데, 그저 귀만 닫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자신들의 뜻대로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사안들이, 왜 수많은 비판들 속에서도 꿋꿋이, 아무런 지장없이 지속되고 있는가는 아마도 그런 사정들 때문일 것이다.
대자보를 작성한 김예슬 학생은 자신의 글 말미에 '행동한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라고 썼다. 그녀는 그 문장을 유성매직으로 썼다. 그리고 그것을 청테이프에 의지해 게시판에 붙였다. 정보와 속도는 지식을 쌓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지성까지는 담보하진 못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인터넷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의 지성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더 무서운 포기가 거기 숨어 있는 것이다.